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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Aug 15. 2024

고마워 유키!



 체감상 어제보단 낮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헉헉댔다. 걷는 이들 중엔  아예 마스크를 안 쓴 사람도 있어서 나도 아예 벗진 못하고 소심하게 턱에 마스크를 걸쳐 쓰고 걸었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지자 왠지 속력이 나는 기분이었다. 기분만.


‘주비리에 알베르게 예약은 했어?’


유키가 내게 물었다.


‘예약? 비수기라서 딱히 예약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는데, 난 그래서 예약 안 했어. 너넨 했어?’


‘까미노는 비수기가 맞지만 지금 스페인 겨울 휴가철이라 사람이 많은 거야! 우리는 이미 공립으로 예약했지. 너도 우리랑 같이 잘 수 있을지 침대가 있나 한번 물어봐줄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갑자기 앞서가던 두 친구들을 부르니 오늘 예약한 알베르게 번호를 받아와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뭐라 뭐라 통화하더니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 오늘 공립알베르게는 예약이 꽉 차버렸던 것이다.


‘미안, 예약이 다 차서 자리가 없다는데…’


 큰 기대도 안 했것만 갑자기 힘이 쭉 빠진다.


‘알아봐 줘서 고마워! 내가 잘 해결해 볼게! 하하하하.’


 내 주특기인 표정관리를 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이 친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이를 어쩐다… 변수가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는데 이를 어쩌지… 나 오늘 밖에서 자야 하는 건가 아님 남들보다 더 가서 숙소가 남은 곳에서 자야 하나 온갖 생각을 다했다.


 



 체력적으로 이미 지쳐있었는데 풀부킹 숙소 이야기를 듣고 나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신적 타격을 입어서 발걸음이 느려져만 갔다. 그 당시 내 멘털은 얇은 유리장보다도 더 약했으니까.


‘유키, 먼저 가! 나 조금만 천천히 걸어갈게!’


‘혼자서 괜찮겠어? 많이 지쳐 보이기는 하네.‘


‘응! 그럼!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아! 원래 까미노는 걷는 속도가 제각각인 만큼 서로의 속도를 존중해 주는 곳이라고 배웠어! 먼저가 네 친구들이랑.’


 나 때문에 친구들과 점점 거리가 벌어지기 전에 유키를 일행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다. 뭐 좀 혼자서 외로우면 어때, 요 며칠 혼자서도 잘 걸어왔는걸?


‘알겠어! 그럼 이따 볼 수 있으면 저녁식사 함께하자!’


‘응!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서둘러 볼게! 식사 제안 고마워.’


 빠르게 걸어가는 유키의 뒷모습을 보며 ‘저 친구 일부러 내 속도에 맞춰 걸어줬구나. 빨리 걷는 것보단 일부러 천천히 걷는 건 더 힘든 일인데 정말 고맙기도 해라!’라는 생각이 들 만큼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습관처럼 미어캣 마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내가 오늘의 마지막 주자였는지 앞 뒤로 아무도 없었다. 말동무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이라도 좋으니 외롭지만 않았음 했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 나. 아무래도 좋았다. 원래 까미노는 서로 웃고 떠들며 가는 것도 좋긴 하지만 혼자 사색에 잠겨 조용히 걷는 매력도 있었고, 처음부터 누구와 함께 걷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하지만 ‘같이의 가치’라는 말이 있듯, 혼자서는 영 속도가 나질 않았다. 괴로운 것 조금만 참아서 이 악-물고 유키랑 같이 갈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충 공부한 까미노는 그랬다.


 ’ 까미노에선 그룹이 만들어져도 그룹 안에서 걸음 느린 이를 기다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고 각자의 페이스대로 걷는다. 그러니 같이 걷지 못해도 아쉬워 말라. 어차피 다들 같은 목적지에서 만날 테니, 같이 저녁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위의 말을 되새기며 걸었다. 까미노 닌자를 보니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는 Bar가 나온다. 문을 열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서둘러 가보기로 한다.




 저 멀리 코너를 돌아 눈에 파묻힌 듯 보이는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근처 길가 위에서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유키도!


 힘을 쥐어짜서 스퍼트를 올렸다. 누군가 나를 보며 손 흔들어주는 게 어찌나 기운이 났던지!


‘유키, 추운데 왜 밖에 나와있어?’


‘너를 기다렸어! 혹시 우리가 여기 있는지 모르고 지나칠까 봐! 생각보다 금방 왔네? 얼른 들어가자. 안에 되게 따뜻해.‘


 어쩜… 다정해라! 나를 기다려줬다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유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땐 작아 보였지만 내부는 무척 공간이 넓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커피와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주문을 했다. 그래서 난 점심으로 무얼 먹었냐고? 그렇다. 또 또르띠아다. 으… 지긋지긋해! 분명 음식에 감사하기로 했거늘! 오늘 아침에도 또르띠아 그제도 또르띠아. 또르띠아! 또르띠아!!!!!!!!!!!!


 그래도 뭐 별수 있나? 체력 비축을 위해선 먹을 수밖에…


 또르띠아와 나의 커스텀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점심을 뚝-딱 해결했다. 익숙하지 않다. 얼음이 잔뜩 든 커피를 마시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저 눈빛들…


 나는 유키 일행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점심식사를 나보다 빨리 끝낸 친구들과 함께 유키는 먼저 출발했다. 생각보다 잘 걸어와서 다행이라는 칭찬을 남기고서.


 신기했다. 아니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었지만, 들어왔을 때 사람들로 북적여 따뜻했던 내부가, 나를 제외한 몇몇만 남아있자 훈훈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갔다.


 내리는 눈을 맞아 축축해져서 말리려고 널어놓은 장갑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나도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지금 Bar에 남아 있는 몇 안 남은 사람들보다 빨리 나가야 조금이라도 꼴찌 신세는 면할 터이니.


 오전 11:55 기준. 2시간 30분만 더 가면 된다! 하지만 내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에서 3시간 30분!


 내가 대략 오전 9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까 이미 약 3시간을 걸어왔다. 오늘의 총 구간 25km에서 13km나 걸어온 셈! 3시간에 13km라니 처음 받아보는 좋은 성적이었다. 1시간당 약 4.3km 페이스로 걸은 셈! 무척 만족스러웠다.


힘내라 힘!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문을 열고 나갔다. 방금의 패기 넘치는 기운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매서운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학습효과 때문인지 걷기 시작하면 더워지는 것을 알아 총총총 음식 먹은 에너지를 내어 속도를 내며 걷자 2분도 안되어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설경을 보며 걸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힘이 들면 고개가 점점 내려와 땅만 보며 걷는 것. 하지만 그때의 난 안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하기보단,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이 길을 보며 힘들게 걷는 것보단 차라리 바닥만 보며 걷는 게 속도 유지에 빠르다고 판단했다.


 오전 11:55에 Bar에서 출발해 땅만 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이미 점심 먹고 출발했던 시점으로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GPS고 뭐고 다 꺼버렸다. 핸드폰은 오로지 시간 체크용으로 사용했다.


 Bar가 있던 곳은 Viscarret Guerendain이라는 곳. 그리고 약 2시간이 지나서 Erro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Erro에서


 혼자 걸어 그런가 4km를 걷는데 2시간이 걸려버렸다. 하지만 남은 기간은 단 9km. 남은 시간은 앞으로 2시간 더!!!! 아까 Bar에서 나보다 늦게 출발한 사람들은 나를 모두 추월해 역시나! 오늘의 꼴찌는 나로 확정!


 꼴찌면 뭐 어떠한가! 오늘도 무사히 도착만 하며 되거늘! 왜 나왔는지도 모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걸을 땐 온갖 생각을 많이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걸어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의식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냥 멍-한 상태로 스틱이 바닥을 찍으며 탁탁 거리는 소리에 맞춰서 걷기만 한다.


 시간이 또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마을이 나왔다. 그곳의 Bar에서 쉬고 나온 사람들과 마주쳤다. 유키 일행은 없었지만 어젯밤 식당과 알베르게에서 마주친 얼굴들이 몇 있었다.


 기진맥진 파김치가 된 나를 보며 입을 모아 다들 힘내라고 응원해 준다.


 나도 잠깐 Bar에 들러서 쉬고 갈까 생각했지만, 난 걸음이 느린 사람이니 길가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걷고 싶지 않다면 휴식을 포기해야 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불안전하게 남은 것을 제외하면 뭔갈 마시며 쉬고 싶지도, 애써 유지해 온 따뜻한 체온을 다시 떨어트리고 싶지 않아 고민 끝에 계속 걷기로 결정했다.


 사람들 말론 주비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저 언덕 밑 뒤로 보이는 곳이 주비리라고 손으로 가르쳐준다.


 주비리가 저 먼 곳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어느 빈 집 앞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배낭을 벗어두고 잠깐만 아주 짧게만 쉬었다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Bar에서 쉴 때를 제외하고 배낭을 처음 벗어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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