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Zubiri! 주비리로!
어젯밤 내가 봤던 믿지 못할 광경? 놀라운 모습은 이것이었다.
잠들기 전, 침낭 안에 누워서 시야가 점점 어두운 방안에 익숙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잠에 들려다가 옆에서 소곤소곤 대는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그곳으로 갔다.
아- 누군지 알 것 같다. 오늘 나랑 같은 방에서 함께 자게 될 나의 룸메이트(?) 부녀 사이로 추정되는 남녀. 둘 다 스페인 사람이며 내가 봤을 때 딸은 20대 초반, 아버지는 뭐 50대 초반 정도?
둘이 손을 꼭 잡고 아버지가 잠들기 전 딸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것 같았다. 남들이 깰세라 소곤소곤하게.
기도를 마치고 아버지는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고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화답하듯 아버지를 꼭 껴안아주었다. 이 둘은 애정 듬뿍 담긴 굿 나잇 인사를 짧게 마치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잘 자렴 내 사랑하는 딸 소피아.’
잠이 쏟아져 내리다가 머리를 또 누가 망치로 한대 친 기분이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 왜?라고 반문 하신다면 정말 건강하고도 사랑 넘치는 특이한(?) 가족일 것이다.
일단 내 심정은 이랬다.
‘아니 지금 내가 뭘 본거야? 성인이 된 딸과 아빠가 서로 사랑한다 얘기해 주고 안아주고! 심지어 딸은 아빠에게 이마 뽀뽀까지 받았다고?’
컬처쇼크. 이건 문화차이다. 문화차이가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나와 내 주변인들의 가족관계를 떠올렸다. 다들 가족 간 관계가 나쁘진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진심을 담아 사랑한다고 말했던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언제 부모님과 안아봤는지 생각하려면 까마득하게 과거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언제부턴가 크리스마스, 생일 등등 1년 치 특별한 날엔 애인 혹은 친구들과 보내오며 마치, 특별한 날에 가족과 집에서 보내기라도 하면 루저 취급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는데.
아빠와 딸이 함께 시간을 내서 걸으러 온 모습에 한 번의 충격이 있었지만, 성인이 된 딸 역시 스스럼없는 부녀간의 스킨십을 하는 모습은 ‘저 가족이 무슨 사연이 있어 스페인에서도 좀 비정상적으로 가족애가 넘치는 것은 아닐까?’란 의심마저 들게 하며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진정한 가족애란 무엇인가?’를 곱씹어보다가 의식이 끊겼다.
23년 12월 5일 오전 8:00.
어젯밤 미리 맞춰둔 알람을 못 들은 것 같다. 아침 7:00에 맞춰놨는데, 자다가 쎄-한 기분이 들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8시.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 엑스트라 침대까지 가져다 놔서 꽉꽉 찼던 방의 인원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이미 길을 나섰는지 나를 제외한 3-4명의 사람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서둘러 침낭을 정리하고 배낭을 쌌다. 나갈 채비를 하고 알베르게를 나오니 시간은 20여분이 지나있었다.
오늘도 거의 하루종일 눈소식이 있어 복장은 어제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했다. 스패츠 없이 비닐봉지를 활용하셨다는 글을 까친연에서 보았지만 겨울길은 제대로 된 스패츠 없으면 정말 힘들듯했다. 돈 아끼려고 비닐봉지 가져오려다 그냥 스패츠 가져온 나! 정말 칭찬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잠이 덜 깨 동태눈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해가 뜨기 전 그 차갑고도 깨끗, 상쾌한 새벽 공기에 눈이 번쩍 떠지고 잠이 확- 깼다.
오늘의 목적지는 주비리로, 보통 론세스바예스 다음 주비리까지 가는 건 자연스러운 국룰인 듯했다.
까미노 길을 이용한다면 22km 4시간 55분 소요 예상이었지만 어제 겨울 까미노 길에 올랐다가 죽음의 쓴맛을 톡톡히 보았던지라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우회도로로 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우회도로 총 거리 25km 예상 소요시간은 5시간 35분.
사실 어젯밤부터 걱정이 많았다. 내 태어나서 처음 도전 해보는 20km 이상의 거리.
솔직히 말하면 나의 계획상으로는 론세스바예스 다음으로 정한 목적지는 주비리가 아니었다. 왜냐면 25km라는 거리를 걸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고작 십 몇 킬로에도 혼자서 세상짐을 다 지고 걷는 것 마냥 힘들어했고, 솔직히 걸을 엄두가 안 났다.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어젯밤 식사 후, 숙소에 돌아와 공용공간에서 사람들과 잠깐 대화를 나눴었는데 한결같이 모두의 목적지는 주비리였고, 나도 왠지 모르게 군중심리에 떠밀려 주비리까지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25km를 걸어본 적이 없어. 아마 주비리까진 못 가고 그전에 스탑 할 것 같아.’
‘아… 그래? 이거 안 됐다. 하지만 넌 주비리까지 가야 해 왜냐하면 이 시즌 오늘의 구간엔 알베르게 오픈한 곳은 주비리뿐이거든. 어찌 됐건 무사히 잘 걷길 바라!‘
(제이미가 말했다. 우리의 만남과 대화의 시초는 이 부분. 잘 기억해 두시길…)
두-둥! 겨울철 알베르게 운영현황 살펴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까미노 닌자 앱만 보고 거기에 숙소표식이 있는 곳에서 적당히 멈추면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 변명을 하자면 피곤에 찌들어서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눈감기 전 찾아보고 찾아본 결과, 나는 무조건 주비리까지 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짧게 어젯밤 회상을 마치고 길을 나서려 했는데 이상하게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25km 5시간 35분이라니… 이건 꿈이야. 정말 말도 안 돼…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 가야지. 넉넉하게 9시간 잡아서 가자! 어차피 도로로 걸을 테니 조금은 해가진 상태라도 괜찮을 거야. 이따 걸으며 먹을 식량과 물 챙기걸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정리, 마음정리를 하러 온 것이 아닌 그저 오늘하루 무사히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마치 생존게임 도장 깨기를 하고 있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스레 실소가 터졌다. 그토록 죽고 싶어 했는데 정말로 죽을뻔한 상황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던 어제의 나의 모습과, 그저 살아서만 도착하자는 결의에 찬 오늘의 나의 모습은 떠나기 전 내 모습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며 너무나도 달랐기에.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어젯밤 저녁식사를 했던 Bar 근처에 가자 일찍 일어났던 사람들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나왔는지 좀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Bar에서 나오는 어제저녁시간에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네덜란드 친구를 보았고 짤게 대화를 나눈 후,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이 친구도 주비리까지 갈 줄 알았는데 하루평균 50km 이상 걷고 있어서 더 먼 곳까지 간다고 한다. 왓츠앱으로 서로 친구 추가를 하고 Buen camino를 서로 외쳐주며 헤어졌다.
(이 친구 크리스마스 전에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괴물인 줄 알았다.)
나도 Bar에 들러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이상하게 오늘도 영- 입맛이 없었지만 살기 위해 입에 욱여넣었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직접 커스텀해서 먹었다. 요 며칠 한국 음식이 그리운 게 아니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단 생각이 절실했다.
지독한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인 나에겐 에너지 드링크나 다름없는 모닝 아. 아를 이상하게 오늘따라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요리조리 굴리다가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우선 에스프레소 한잔과 얼음물 한 컵을 주문하고 나온 커피를 자리에 앉아서 섞으면 완벽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탄생한다. 나의 커스텀 커피는 눈물 없인 마실 수 없는 경이로움과 행복이 뒤섞인 맛이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스페인어로 유창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Bar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주문하기 뚝-딱!)
음… 그래… 그곳엔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아아를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약간 기절.
주로 카페콘레체를 마시는 스페인 사람들도 약간 기절.
나를 특이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한 채 Bar에서 나오기 전 오늘 마실 생수 한 병과 초코바 두 개를 사서 나왔다.
밥심 아닌 방심. ‘앞으로도 빵에 익숙해져야 해…’라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며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내 딴엔 서둘러 출발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론세스바예스 작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여기가 설국인가? 싶을 정도로 길고 눈이 덮인 도로가 끝없이만 보였고 잠깐동안 ‘오늘의 테마는 시간과 정신의 길인가…?’ 생각했다. 앞에 사람이 보이긴 했지만 따라잡을 엄두도 안나는 거리였다.
간간히 습관처럼 뒤를 돌아보기를 하다가 여자 셋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체감상 나와는 거리가 먼듯했으나 신발을 스케이트로 신었는지 빠르게 거리가 좁혀져 갔다.
일단 두 명과는 까미노식 인사를 주고받고 날 스쳐 지나갔다. ‘음… 이 아시아계로 보이는 친구는 어디서 왔을까?‘ 나와 피부색이 비슷한 한 명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곤 운 좋게도 동질감을 느꼈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게 됐다.
이 그룹은 상당히 재밌는 구성이었다. 두 명은 본투비 스페니쉬, 한 명은 필리핀에서 왔지만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스페인에 정착 중이라고 했다. 연휴 기간 전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맞춰 우정여행 겸 까미노에 온 것이라 한다.
다들 겨우겨우 일주일의 시간을 내서 온 것이라 끝까지는 못 가고 일단 주어진 시간 동안 갈 수 있을 만큼 걷고 그 이후의 여정은 다음에 함께 다시 시간을 맞춰 진행할 예정이라고.
스페인에 살면 이런 방법도 가능하구나…라고 처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언제든 올 수 있는 곳이라니! 내겐 몹시 꿈같은 일이었다. 부러웠다.
대부분 해외에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끝까지 다 가야지! 하는 사람 90% 남은 구간은 다음에 시간 나면 마저 걸어야지! 하는 사람 10% 로 9:1 비율에서 거의 9에 속하는 우리들은 이것이 왜 부러운 일인지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간 여전히 앞쪽엔 레알 스페니쉬 친구 두 명은 빠르게 걷는 듯했으나 간간히 뒤를 돌아봐주며 여전히 간격은 있으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주었다.
무척 기뻤다. 겨울엔 거의 사람 그림자도 없다는 소문이 하도 자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내내 혼자서 외롭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같이 걸을 일행이 생겼다니!
입에 거미줄 치고 말없이 홀로 걸어온 이틀 전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걷는 사람의 속도 외 맞춰 걷다 보니 힘들긴 했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래도 굳이 굳이 고통스러운 부분을 찾자면 ‘추위’였다. 분명히 옷을 껴입을 수 있을 대로 껴입었는데 이게 부작용이 됐던 건지 조금만 멈춰서 쉬면 땀이 금세 식어 옷 속까지 산속의 뼈 시린 한기가 들어왔다.
어제처럼 마냥 산을 빙빙 돌아올라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빙판이 된 얕은 오르/내리막 도로를 걸으며 서서히 또 체력이 방전되기 시작했다.
연일 새벽 출근이 잦아 약속된 날에 업데이트하지 못한 점에 죄송한 말씀드립니다. 약속의 날을 지킬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