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부모님께 쓰는 편지
<서른일곱 살, 2024. 12. 3. 화요일>
#부모님 #IMF #살아내기
퇴근하고 혼자서 저녁을 먹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국가 부도의 날이라는 영화 리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시기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거기에서는 우리나라가 거대 자본에 잠식당하는 것에 홀로 맞서 싸우던 한 주인공을 다루고 있었는데, 저는 문득 그 시기 지독했던 나의 열 살, 우리 가족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남의 카센터에서 일하던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가 살던 곳 옆의 작은 도시에 카센터를 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어 몇 날 며칠을 울며 밤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사한 곳은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동차 리프트가 간신히 놓이는 카센터에는 사무실이 하나 있었고, 그곳과 연결된 작은 방 두 개가 우리 집이었습니다. 웃풍이 심하게 드는, 차 고치는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는 조립식 건물이었지만 우리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세 살 어린 동생과 동네를 쏘다녔습니다. 눈으로 뒤덮인 뒷동산에서 한바탕 구르고 나서 집에 돌아와 얼얼해진 손과 귀를 녹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믹스커피를 타드리기도 했고, 손님이 없을 때는 대걸레를 열심히 빨아 김건모의 노래를 부르며 정비고 바닥을 닦기도 했습니다.
땡볕이 내리쬐는 계절로 바뀌었을 때 엄마는 선캡을 뒤집어쓰고 도시에 보도블록을 깔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엄마가 우리 카센터 앞의 도로에 다른 아주머니들과 쪼그리고 앉아 벽돌을 나르는 모습을 보고 알았습니다. 세상은 왜 그랬는지 어머니는 쌀을 사서 오토바이에 싣고 오던 길에 넘어져 무릎이 훤하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 우리는 서로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동생과 햄 한 조각을 더 먹겠다고 다투었습니다. 때로는 주말에 카센터 셔터를 내렸음에도 낯선 아저씨들이 찾아와 아버지를 찾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디 숨을 곳도 없는 작은 방에서 부모님이 싸우면 저와 동생은 서로 바닥만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삶은 불행했을까요? 저는 그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끔 그 시기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지금은 그 시기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우리가 이사한 시기는 영화에서 다루었던 1997년 한 겨울이었습니다. 뉴스에 IMF라는 단어만큼이나 비극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는 걸 기억합니다. 어느 집의 가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는 심지어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그 시기를 살아온 부모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부모님은 지금의 저보다도 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다투었을지언정 도망가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놓아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챙겼습니다. 그 시기 삶을 포기한 부모를 두었던 사람들처럼 저와 동생은 상처 입지 않았습니다. 살아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덕에 퇴근길에 부모님과 동생에게 전화해 오늘 하루가 꽤 괜찮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저녁은 엄마가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는 햄버거였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이걸 먹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추우니 따듯한 국밥 한 그릇을 사 먹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이게 맛있습니다. 어렸을 때 시내에 햄거거 가게가 처음 생긴 날 긴 줄을 기다렸다 사 먹었던 기억 때문은 아닙니다. 그냥, 그냥 맛있습니다.
다만, 그저 앞으로는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세상이야 IMF가 또 오건, 전쟁이 나건 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걱정 없이 살았으면 합니다. 손주가 그렇게 커갈 동안, 아버지 어머니도 혹시 예전의 기억이 마음 한 구석에 가시처럼 남아계신다면 그저 훌훌 털어버리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상처 주는 말은 책임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고, 그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어지러웠을 뿐이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이불 잘 덮고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