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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별 Jun 05. 2023

1남 3녀의 성적표

기쁜별의 유년 에세이4


큰언니는 79년 2월 생이라 78년에 태어난 친구들과 학교 다녔다. 둘째 언니는 80년 12월 생. 나는 82년 4월, 남동생은 84년 8월 생. 엄마는 이렇게 줄줄이 2년 터울로 아이를 낳았고 학교 보냈다.



큰언니는 어디서나 모범생이었다. 내가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니가 OO이 동생이가?'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언니는 6학년 때 전교 부회장(당시 남자가 회장, 여자가 부회장을 할 때라)도 했었다. 2학년이던 나는 운동장 조례에서 단상에 올라간 언니 모습을 자주 보았다. 성적 우수상, 모범상 이런 것도 언니 몫이었다. 큰언니는 나의 우상이었다.



언니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언니가 친구 모임 가는데 따라간다고 떼를 썼다. 언니는 안된다고 하다가 결국에 데리고 갔다. 언니들 모인 곳 옆에서 심심하게 혼자 듣고 있어야 했지만 데려가 준 언니가 고마웠다. 그리고 이젠 절대 따라오지 말아야지 생각도 했다. 어릴 때는 눈 감고 있으라고 사탕 준다고 하곤, 솜뭉치 같은 것을 넣어주기도 했던 짓궂은 언니였는데 어느 순간 착하고 바른 언니가 되어 있었다. 언니는 책도 많이 봤다. 그리고 멋진 구문은 책상에 적어 붙여두기도 했었다. 그런 것들 하나까지 멋져 보였다. 나도 그래야지.



언니가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올 때 안 자고 기다렸다. 가끔 맛있는 간식거리가 있으면 차려주기도 했다. 언니를 위해 간식을 내주는 것이 기뻤다. 언니가 고맙다고 하면 그게 좋았다. 언니 성적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관심사였다. 고3 담임선생님도 언니를 신경 쓰며 서울에 좋은 대학으로 보낼 수 있겠다고 예상했다. 수능을 봤고 성적은 아쉬웠다. 여러 개 원서를 내기도 전에 특차 전형으로 서강대 전자과에 합격해버렸다. 서강대. 서울대 아니고. 정시 모집에서 연세대도 적어보려 했었는데 입학이 확정되었다. 언니는 서강대생이 되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LG전자로 입사했다.



둘째 언니는 좀 커서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였나? 아빠는 언니에게 손 빨지 말라고 잔소리 했지만 잘 때 몰래 빠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 언니는 덧니가 있다. 할머니는 내가 일찍 태어나 둘째 언니가 젖을 제대로 못 먹었다고 그래서 약하다고 했다. 어릴 때도 약했고 지금도 약한 언니다. 큰언니가 공부 잘해서 그보다 더 잘하는 게 아니면 보통이 되었다. 노는 것을 좋아했다. 장난기 많고 잘 웃었다. 토라지기도 잘 하고 예민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럼 엄마는 덮어두고 괜찮다고 말했다. 난 엄마가 괜찮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언니는 그게 싫었다고 한다. 병원을 데려가든지, 아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는 게 서운했다고.



중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재밌게 노는 언니가 되었다.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시외로 나갔다 오기도 했다. 그때 언니는 생기있게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한풀 꺾였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언니보다 더 대답도 빠르고, 리액션이 좋은 친구가 나타났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흥미를 잃었다. 아빠가 저녁마다 숙제검사 해도 언니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 목소리가 커져도 그때 좀 훌쩍일 뿐 다음날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나랑도 자주 다퉜다. 하루는 다 같이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내 발아래로 굴러간 풍선을 달라고 했다. 주기 싫었다. 그냥 해줘도 될 일을, 큰언니에게라면 진작해줬을 것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주라', '싫다'가 오가다가 방을 나와버렸다. 나오고는 후회했다. '그냥 줄걸,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대놓고 차별을 했다.



고등학교를 진주로 갔던 나는 둘째 언니 고3 시절엔 옆에 없었다. 언니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가까운 진주 전문대학 유아교육과로 들어갔다. 아빠에게 둘째 언니는 고민이었는데 입학할 때 장학생이라고 등록금도 내지 않았다. 유아교육학과에서 여러 책을 보면서 언니는 본인만의 교육철학을 만들어갔다. 만들기도 잘하고 재밌게 배우는 언니를 보며, 언니는 저런 공부가 맞구나 싶기도 했다. 졸업하자마자 집 주변 유치원에 교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래 일하지 못하고 일 년 만에 관뒀다. 유치원은 재밌어야 한다는 모토로 즐겁게 지내다 보니 아이들이 흥분했고 다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유치원을 관둔 언니는 휴대폰 수리를 배우겠다며 지원했고, LG 서비스센터의 기사로 다시 취업을 했다. 이때부터 수도권으로 올라와 자매 셋이 같이 지냈다. 그 뒤로도 이런 일, 저런 직종에서 근무했다가 쉬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 jule_42, 출처 Unsplash


 나는 진주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단국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입학했다. 단국대 원서 넣으러 갈 때 아빠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이런 들어보지도 못한 대학교 보내려고 진주로 고등학교 보낸 줄 알아?' 말은 안 했지만 느껴졌다. 공대로 들어간 것은 아빠가 취업이 잘 된다고 그쪽 계열로 원서를 넣으라 권했기 때문이었다. 공과대학에는 토목, 전자전기컴퓨터, 기계, 화학공학과가 있었고 2학년 때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친구가 전자전기컴퓨터과를 갔지만 왠지 싫었다. 그나마 할 수 있겠다 싶은 화학공학과를 선택했다. 막연하게 어디든 가겠지 싶었는데 운 좋게 삼성전자 반도체에 입사하게 되었다. 부끄러운 딸에서 자랑스러운 딸로 갑자기 바뀌었다.



남동생은 삼천포에서 고등학교까지 지냈다. 막내라서, 아들이라서 할머니가 끼고돌았다. 아빠는 큰언니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남동생을 공부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남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본 일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 때는 축구한다고 자주 늦게 들어왔다. 할머니는 TV 보는 나를 불러서 찾아오게 했다. 짜증 났지만 내가 안 가면 할머니가 아픈 다리 이끌고 돌아다니셨기에 찾아다녔었다. 남동생 중학교 1학년까지만 같이 지내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주로 가느라 집을 나왔다. 동생 중, 고등학생 시절을 잘 알지 못한다. 엄마 말로는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잘할 텐데 적당히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도 크게 힘들게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능을 봤고 원서를 썼다. 서울시립대학교 토목과에 입학했다. 의외였다. 내가 다니는 대학보다 좋다고 생각되었다. 등록금이 저렴하니 그것만으로도 효자가 되었다. 자매들이 큰언니 직장 근처인 평촌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남동생은 혼자 학교 주변에서 하숙을 하며 지냈다. 주말이면 우리가 사는 곳에 오기도 했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군대에 갔다가 다시 복학해서 지내더니 졸업하면서 SK건설에 입사했다.



삼성, LG, SK. 우리나라 대기업에 한 명씩 들어가 있다. 취업 잘 되는 학과로 보내고 싶었던 아빠 바람과 노력 덕에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사했다. 아빠나 선생님 말씀 잘 듣던 형제들은 다시 상사 말, 회사 말을 잘 들으며 생활하고 있다. 아빠는 우리를 보면 마음이 편하고 든든하실까? 둘째 언니가 빠져서 아쉬우실까? 유난했던 공부 지도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결과인가? 나 하나만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넷을 적고 보니 학비며 생활비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들인 공에 비하면 거둔 게 부족한 자식농사로 보인다. 부모님은 무엇을 거뒀을까? 자식 농사에는 거둔다는 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모는 오직 주기만 하는 거구나.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거구나.



자녀의 삶이 부모님 성적표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아쉽다. 부모님은 훨씬 더 멋진 분인데 내가 모자라 그들을 빛내지 못하고 있다. 1남 3녀 성적표와 무관하게 내가 부모님 성적을 메길 수 있다면 최고 점수를 드리고 싶다. 나에겐 최고의 부모님이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아니, 이제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다.



© nikulinayan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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