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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eng Oct 23. 2022

슬픔을 마주하는 방법

9. Shining Boy & Little Randy




너무 행복할 때면 나는 행복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고는 한다. 이제는 행복한 시간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항상 아픔은 행복에 비례한다. 높게 날수록 추락할 때의 고통은 배가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행복을 경계하는 겁쟁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고민이 없는 것보다 적당히 있는 걸 선호한다. 슬픔이란 어찌 보면 평생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감정이 되었다. 적당한 우울감은 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잠식당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다 보니 어느샌가 불편하지만은 않은 공생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에는 줄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의 신경 다발들이 끊어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슬픔이 찾아올 때는 무작정 달린다. 나를 아무것도 없는 곳에 내던지는 행위가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든다. 정신 차려보면 모르는 곳에 도착해 있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몸을 깨끗이 씻고 나면 방 안에 틀어박혀 씻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가 달리기와 관련되어 있다. “실연으로 낙담에 빠질 때가 있다. 가슴이 아프면 난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달려본 적은 없지만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찾아오게 되면 시도해봐야겠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 슬픔이 못 쫓아오지 않을까.




깊은 밤, 문득 너무 슬플 때에는 클래식을 듣는다. 신나는 음악으로 애써 슬픔을 외면하는 건 내게 그다지 맞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슬픔을 마주해야만 지울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슬픔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Shining boy & Little Randy’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문득 너무도 공허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는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실감한다. 극한의 슬픔에 다다를 때에는 오히려 슬퍼지지 않는다. 스피커 소리를 크게 울리고 눈을 감는다. 노래가 커질수록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나는 공백을 향해 날아간다. 끝을 모를 비행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쥐려 할수록 흘러버리는 것들에 연연하지 말기를. 모든 것을 운명이라 여기고 휘몰아치는 감정에 덤덤해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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