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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eng Oct 27. 2022

지나고 나서 보이는 것들

13. 두더지 굴




내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했다. 무척이나 행복했던 얼굴이었나 보다. 사진첩엔 네가 찍은 사진들만이 가득하다. 뭐가 그리 행복했던 걸까.





애초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 시간을 되돌린다면 당신은 나를 차라리 만나지 않았기를 바랄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당신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나를 소중한 사람이라 여겼다면, 나와의 시간을 그리워했다면 그건 나로서도 너무 슬픈 일이다. 한 번이라도 내 소식을 궁금해했을까.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미어진다. 한 없이 미어지는 마음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괜찮다고 여기려는 시도들이 어김없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밤이 한없이 길다. 이런 날에는 눈을 감고 강제로 전원을 꺼버리는 수밖에 없다.







사실 글을 쓰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런 글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해변가에서 아무리 모래성을 지어봐야 내일이면 파도에 휩쓸려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매일 같이 모래성을 지었다. 아, 정신 차려보면 어디에 모래성을 지었는 지조차 불분명해진다. 나의 부재가 당신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의 행복이라 했다.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어떠한 연락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또 두더지 굴로 숨어버린다. 점점 더 두더지 굴이 편해져만 간다. 오늘따라 날 괴롭히는 빨간 불이 이제 그만하라는 것만 같다. 가까웠었던 이가 그랬다. 모든 일이 일어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결국에는 잘 된 일이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간 것뿐이다.




문득 너무도 슬퍼지는 날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그 친구가 너무 감성적인 탓이라며 넘겼었다. 창 밖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흐린 날에는 멀리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날이라도 맑았으면 뭐가 달랐을까. 오늘따라 날이 춥다. 아무리 이불속으로 들어가도, 보일러 온도를 높여 봐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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