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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떡꿀떡 Feb 22. 2022

긴급생계비를 신청하러 가던 날

  이러다가는 손가락만 빨다가 죽겠다 싶었다. 아이가5살이었을 때 기관에서 퇴소하고 집에서 가정보육을 해야했고, 나는 나대로 질병으로 퇴사해 둘이 다 꼼짝없이 집만 지키던 여름날 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 아이돌보미라도 부르고 일자리 면접이라도 보러 갈래도 제도가 희안했다. 재직중일 때는 소득에 따라 돌보미 비용을 지원받아 거의 내지 않아도 됐는데 무직일 때는 소득과 상관없이 본인부담이 100%였다. 도우미 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었다. 여성의 취업을 돕겠다는 것인지 집에만 있으라는 것인지 잘 분간은 안갔지만 여튼 그랬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모든 음식을 다 볶음밥으로 둔갑시켜 파먹은지는 오래고, 통장에 남은 100원, 200원도 한 계좌로 긁어긁어 모아 농협가서 인출해 아이가 먹고 싶다는 홈런볼을 사줬다. 궁리 끝에 핸드폰 모바일 결제로 음식을 마련해 먹었다. 이마저도 한도는 50만원이었다. 돈을 빌릴 친구도 없었고 카드 회사에서는 연신 돈을 갚으라고 전화벨이 울려댔다.


 주민센터에 ‘긴급생계비’라는 복지지원제도가 있다는 것은 작년즈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평범하게 학교 생활하고 직장 생활 했었던 나는 나랑은 상관없는 제도인 줄로 알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이혼하며 실직하고 양육비도 못받고 도와줄 지인가족 하나 없던 나는 이 제도가 금방 떠올랐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동네 어귀에 있는 주민센터에 갈 수가 없었다. 다들 나를 알아볼 것만 같았고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도 동네에 소문이 쫙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 복지제도를 이용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볶음밥을 할 재료도 없고 아이는 무더위에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다. 궁여지책으로 차라리 구청으로 가기로 했다.


  구청은 그래도 동네에서 좀 떨어져 있으니 나를 몰라볼 것 같았다. 그리고 여태의 경험으로 주민센터 직원보다 구청 직원이 제도도 더 정확히 알고 나에게 무안주지 않을 것 같다는 감이 있었다. 구청이 다행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그 어느 여름 날 나는 용기를 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구청에 전화 해 자격이 가능한지 구비해야할 서류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보고 상담 예약을 했다.


  은행 업무가 익숙지 않아 거래 통장 1년치 계좌내역을 다 뽑아오라는데 전주에서 부터 쓰던 ‘전북은행’ 거래내역을 서울에서 어떻게 뽑아가지 싶었다. 한부모 가족 카페의 도움도 받고 은행에도 물어물어 통장들 계좌 내역도 챙기고 심란하긴 했지만 서류들은 그래도 준비할 수 있었다.


  이제 용기를 내어 구청으로 발을 내디디기만 하면 됐다. 걸어서 가는데 가는데 땅바닥만 쳐다보고 가니 그 발등이 뇌리에 콕콕 박혔다. 내 면상이 구청까지 가는 아스팔트 길바닥에 갈갈이 갈리는 기분이었다. 내 발걸음 하나, 아이 발걸음 하나 언덕배기에 있던 구청을 아이는 오랫만에 외출에 신이 나서 올랐다.


  그리고 복지사님과 마주 앉아 상담하게 됐을 때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소변을 잘 마려워하지 않고 어디 멀리 여행 가도 소변을 잘 참는 편이었는데 그날 따라 소변이 마렵다고 나를 졸라댔다.


  “엄마 오줌 마려워. 화장실 가고 싶어.”

  복지사님과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을 끊고 싶지 않았고, 실은 내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 없는 지 자체를 몰라 너무 초조하고 떨려서 그 가까운 화장실조차도 아이를 데려가려고 엉덩이를 떼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참아. 참아.”

  그 넓은 사무실에, 수많은 직원들 사이로 정적이 가득했다. 복지사님도 나의 긴장을 아셨는지 잠깐 화장실 다녀오라는 말씀도 못하셨다. 그 때였다. 어떤 50대 정도 되어보이시는 남자 공무원 분께서 ‘일루와. 아저씨랑 가자.’하고 나 대신에 아이랑 화장실에 가주셨다. 정말 너무 감사했는데 그 때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만 했다.


  상담은 내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왜 일을 안하시죠?’ ‘이런 제도는 당신같은 젊은 사람 말고 정말 어려운 분들 이용하라고 있는 제도예요.’ ‘아직 나이도 젊은 분이 왜 이렇게 벌써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세요.’ ‘아니, 주변에 도와줄 분이 그렇게 하나도 없으세요?!’ 따위의 소리는 하나도 듣지 않았다. 서류를 살펴 보시더니 심사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될 것 같다며 2,3일 내로 생계비가 입금될 거라고만 했다.


  여기까지만 기억이 나고 그 후에 아이랑 어떻게 돌아왔는지 며칠 후에 돈이 들어왔는지 그 때까지 어떻게 버텼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돈이 들어오자마자 주린 배를 붙잡고 한참을 고민하다 시장에 가서 족발을 사다 아이는 살코기, 나는 비계부위 신나게 노나먹고 뼈에 붙은 살점하나까지 낱낱이 떼어 또 볶음밥을 해먹었던 기억은 난다.


  오늘에 갑자기  날의 기억이 나는 까닭이 아련한 추억으로 승화되서 였으면 좋으련만.  때의 형편이 오늘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떠올랐고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에 글로 나마 걱정 한숨이라도 덜어볼까 했다.  때의 형편이나 오늘의 형편과많이 르고 기쁜 언젠가의  날의 형편이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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