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나고 나서는 줄곧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었다. ‘우리 엄마는 날 사랑한건가 아닌가… 에이, 그래도 부모인데 당연히 사랑하긴 한 거겠지.’ 하고 넘기려해도 무언가 찜찜하니 내 마음에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질 못했다.
결혼할 당시에 아빠 직업은 백수에 노름꾼이랬다. 아빠같이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남자는 처음 만나봐서 결혼을 했다는 한 미모하던 우리 엄마는 여러번 헤어지려고도 했단다. 그런데 뱃속에 내가 들어서서 지우지를 못하고 결혼을 하셨다고 하셨다.
그래도 아빠는 결국 택시운전사라는 직업을 찾으셔서 평생 성실하게 일하시고 생계를 이끄셨는데… 이렇게 한 자리를 찾기 까지, 아니 찾고 나서도, 아니 내가 기억하는 한 부모님의 결혼 생활 내내 싸우셨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자주 저녁마다 소주를 드시며 우셨는데 그럼 나는 엄마의 안줏거리 이자 말동무가 되어드렸다.
엄마가 너무 안쓰러웠고 아빠가 미웠다.
“너만 아니면 내가 이런 결혼 안했을텐데….”
“으휴. 너는 생긴 것부터 니네 할머니랑 아빠 닮아가지고는, 성격도 아주 지랄 맞어….”
엄마 술상도 정리하고, 가끔 게워내신 쓰레기통의 토사물도 내가 치워드렸다. 아직 학교도 다니기 전이라 제대로 지랄도 떨어본 적 없는 것 같았는데 지랄 맞다니 지랄 맞은 가보다 했다. 할머니는 주름이 많아 이목구비를 잘 모르겠던데 닮았다니 닮았나보다 했다. 내가 아빠를 닮아서 미안하기도 했고 어떻게 엄마를 위로해드려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평생을 근검 절약으로 집평수를 넓혀가며 단칸방부터 30평대의 아파트까지 이사를 하셨다. 나는 고1 때 기숙사에 들어갔고 어느 주말에는 갑자기 이삿짐을 꾸려 이사를 가셨고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내 방이 없었다. 우리 집에는 부모님방, 여동생방, 남동생방만 있었다. 주말에 집에 돌아오면 나는 거실에서 잤다. 고3 때는 단체 생활에 지쳐 기숙사를 나왔는데 집 앞에 독서실 한자리를 얻어주셨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독서실에서 잤고 주말에는 자주 친한 친구의 집에서 잤다.
대학교 때는 간호학과가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 학기 중에 휴학을 해버리는 일이 있었다. 당장에 자취방으로 쫓아오셨는데 빨리 졸업하고 취업해야지 뭐하냐면서 당장 지원을 끊어버리셨다. 알바 구해서 급여 받을 때까지 한두달만이라도 지원해달라고 그 뒤에는 제가 알바해서 생활하겠다고 간곡히 부탁드렸는데 그대로 바로 지원을 끊으셨다. 정말 너무 죽고 싶다고 힘들다 했더니 죽던지 말던지 맘대로 하라며 전화도 끊으셨다. 그 해 겨울에는 보일러를 틀지 못하고 잠깐 만났던 남자친구를 졸라 얻었던 두꺼운 핑크색 극세사 이불로 겨울을 났다.
아이를 낳을 때 엄마가 오시지 않았던 건 설마가 사람잡는 정도의 일이어서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되려 기대도 없었는데 필리핀에 계시던 (전)시부모님이 입국하셔서 시어머님은 진통할 때 내 옆을 지켜주시고 시아버님이 아이 첫 사진을 찍어 보여주셨다. 아 엄마는 그 날 독감예방접종도 맞아야했고 계모임에도 가셔야 해서 바쁘셨다. 나도 지지 않고 한마디는 해놨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아도 이것보다는 가서 들여다 보겠다.’라고.
물론 엄마가 엄마로서의 도리를 잊거나 책임을 게을리하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무언가 차가웠다. 동생들은 엄마 품에 잘도 안겨 노는데 나는 엄마가 안아주기만 하면 숨도 막히고 불편했다. 그리고 36살, 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되어 직접 모성애를 경험해 본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다만 엄마가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롭고 아빠가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나에게 더 사랑을 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환경이 어려워도 좋은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고 드물다. 우리 엄마는 막내딸이라 그런지 약한 사람이었나 보다 싶다. 다 이해되지 않아도 언제까지고 궁금증을 안고서 살아가느니 최악의 결론을 적당히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저 나는 자라면서 없었던 게 이쁜 옷이나 비싼 학원이 없었던 것처럼 엄마의 사랑도 그 중에 하나로 치기로 했다. 없으면 없는 것이다. 없으면 말면 된다. 없어도 안 죽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