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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제 Sep 04. 2024

"연금 받고 살면 편안하겠습니다."

- 나의 선생님 이야기 3편 -

교육공무원으로 명예퇴직한 요즘에 지인들을 만나면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연금 받고 살면 편안하겠습니다?

그냥 웃고 만다.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 40년간 원망했던 고3 담임 선생님>     


사실 교직은 내가 직장을 찾던 20대 시절에 선호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당시는 대기업과 은행과 증권회사는 모두가 가고 싶은 꿈의 직장이었다. 이런 직업에 대한 선호 사상이 바뀐 결정적인 사건은 IMF 사태였다. 보수가 적어도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것이다.      


사범대학은 대개 공부는 잘하는데 집은 가난하고 성격이 착하면 진학하는 곳이었다. 내가 대학에 갈 시점에 우리 집은 꽤 기반을 잡아 살만한 집안이었고, 나도 서울의 대학에 가고 싶은 의지가 매우 강했고, 서울의 주요 대학에 갈 만큼의 입시성적도 받았다. 당시 나는 사범대학에 갈 마음이 1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선생님의 원서 한 장 때문에 지방 사범대학에 가고 말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런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당시는 그러했다. 내가 교사가 된 사유는 딱 한 가지였다. 고3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사범대학으로 써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궁금하다. 왜 고3 담임선생님은 나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너는 사범대학으로 가라 하면서 원서를 써주셨는지?     


사범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도 교사는 내가 원하는 직업이 아니었고 교직으로의 목표가 없어 성실히 다니지 않았고 2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사범대학으로 복학하여 새로운 지도교수님을 만나고 교생실습을 다녀온 뒤 교직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34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고3 담임이신 권** 선생님을 원망하면서 살았다.

월급봉투 사진에서 보듯이 한 달 30만 원이 안 되는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전해주면 아내는 자신의 월급과 합하여 한 달 살림을 살아야 한다. 미래를 위해 저축이라도 하려면 품위유지비 같은 것은 사치였다. 그런데 퇴직하면서 내 인생에 가장 고마워해야 할 선생님이 되었다.  

< 1989년 발령받은 뒤 우연히 발견한 1990년 5월의 월급봉투 사진이다.>

 70년대 시절에는 교육 현장에서 학생의 인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다니 남자학교에서는 성적이 떨어진다고 매를 맞는 일은 사랑의 매로 치부되었고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졸다가 뺨을 맞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런 상처는 평생 갔다. 어린 중학생 시절에 내가 느낀 교실이란 공간은 세렝게티의 벌판이었고 학생은 약한 사냥감처럼 느껴졌다. 학생들의 인권과는 무관하게 대다수의 선생님들은 헌신적이었다.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직접 청소를 다 해두고 학생들을 맞이하는 성인(聖人) 같은 선생님, 심지어 자기의 자식처럼 가르친다면서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부족한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계셨다.  


요즘은 교사의 교권이 아주 많이 약해지고 학생의 인권이 너무 많이 향상되어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에 안타까운 심정이다.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교사의 소식이 가끔 들린다.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인권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업권을 보장할 만큼의 교사 권위와 소중한 학생의 인권은 법으로 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서 배려와 존중의 성숙한 문화가 꼭 필요한 것 같다. 교권이 떨어지는 것은 교사의 사기 저하로 결국 학생들의 학습권에 영향을 미치고 공교육의 질이 저하로 이어진다. 또한 학생의 인권이 너무 떨어지면 학생들의 행복지수는 급격하게 낮아진다.


학생의 선택권이 완전히 무시된 선생님의 사범대학 진학의 결정은 40여 년 후에 빛을 발한다.

고3 담임선생님께서 40년의 미래를 내다보신 것일까?


이 글을 보실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원망만 했던 고3 담임 선생님께 깊이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브런치 스토리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글 속에는 불공정한 사회현실에 대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헤쳐 나아가려는 의지와 노력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한 젊은이들의 글을 보면서 이제 응원으로 격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교육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 중 하나는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원하는 대학진학을 위해 3개월간 학교 교실에서 잠을 잤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나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결과는 허무하게 흘러갔다. 교직에서 승진을 위해서 5년간 장학사에 도전해 보았지만 실패한 경험도 있다. 죽도록 열심히 노력해도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몹시 분노하거나 불만을 품었다.

  마라톤에 심취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공정한 게임,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게임, 꿋꿋이 앞만 보고 달려가면 반드시 기록이란 결과로 보답하는 경기여서 너무너무 공정한 게임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공점이란 관점에 과다하게 매몰되어 자신을 대입시키면 몸과 마음이 지친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일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몰두하면서 근무하던 때도 기억이 난다. 진로진학상담교사 시절이 그러했다. 학생들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가장 보람되고 세상의 편견과 멀어져 있던 시기였다.

< 로마의 스페인 계단 위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에서 바라 보는 일몰의 모습>

P.S. : 사진설명 _ 경남 도립 미술관 관람하고 필자가 따라 그려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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