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선생님 이야기 2편 -
< 평생 보답하는 고마운 선생님>
살다 보면 행운(幸運)이 많이 작용한다. 나는 운이 좋게 야구라는 운동을 접했고 덕분에 평생 운동신경이 좋다는 칭찬을 받으며 살았고 모든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다. 남자가 운동을 잘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에 너무 많은 이점이 있다. 초등학교 야구 은사님을 만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운에 의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에 야구선수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돌고 많은 학생이 지원하였다. 체격이 작은 나는 처음부터 야구부 면접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히 나의 삼촌께서 생일 선물로 사주선 야구글러브와 야구공으로 동생과 가지고 놀았던 그 일 때문에 야구를 한 달 정도 먼저 시작한 계기가 되어서 체격이 작아도 운동감각이 있는 아이로 소문이 나서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2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어 내고 우리 야구부는 시 대표, 도 대표로 선발되었고 모든 운동선수의 꿈의 무대인 전국소년체전에 경남 대표로 출전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75년 소년체전 1회전에서 강원 교동초등학교를 만나 치열한 접전 끝에 0:0으로 경기를 마치고 추첨했던 일정이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우리 팀 주장은 제비 뽑기에서 뒷순위로 밀려나고 상대 팀 주장이 뽑은 제비가 승리(勝利)로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2년 반 동안의 고생한 기억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모두 운동장에서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해 전국소년체전 우승팀은 강원도 대표인 교동초등학교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야구협회장기 전국야구대회에서 승승장구하던 우리 학교는 4강에서 군산초교 선동열 선수를 맞닥뜨렸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 시합에서 만난 선동열 선수는 괴물 투수였다. 초등학생임에도 거의 성인의 체구였으며 공의 위력이 초등학생들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낙차가 컸다. 아무리 많은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고 극복할 수 없는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우리는 준결승 4강에서 10:0 콜드게임으로 지고 결승에서 군산초는 14:0으로 우승하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동열 감독님이신 것 같고 오른쪽 맨뒤가 올제이다. 이 사진을 보면 아마도 선동열 감독님은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떠올릴 것이며 올제에게 연락할지도 모른다. ㅎㅎ
어린 시절의 성공한 학습경험은 무척 귀한 자산이다. 모든 운동에 자신감이 생기고 작은 체격의 나는 남자의 세계에서 인싸로 살아갈 수 있었다. 야구는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내 인생의 중요한 인연이었고 대학에서 야구동아리로 2년 활동하였고 나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서 마지막 근무를 하게 되었다.
유소년 야구선수출신인 나는 관리자로 부임하여 교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야구감독과 면담을 하였다.
"나도 유소년 야구선수 출신이어서 어린 선수들의 마음과 뒷바라지하는 학부모의 심정을 잘 이해하니 한마음으로 열심히 지도해서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 거두도록 노력합시다."
야구부 감독님과 나는 서로 뜻이 잘 맞아 의기투합하였고 나는 최선의 심적, 물적지원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운동장에서 학생들의 연습에 참여하였다. 대학동아리에서 투수 출신인 나는 18.44m의 투수 거리에서 2m 가까운 16.44m에서 배팅연습볼을 던져주었다. 1인당 10개씩 100개 정도의 배팅볼을 던져주고 나면 약 한 달가량 오른팔을 못쓸 정도로 근육이 뭉쳤다. 그래도 학생들이 무척 좋아했다. 어린 학생에게 슬며시 물어본다.
"교장샘이 공을 던져주니 연습에 방해가 될까 조심스러운데 어떻게 생각하니?"
"사실 교장샘이 배팅볼을 던져주니 더 집중해서 타격에 임하게 되고 감독님이나 코치님들도 더 열심히 가르쳐주려고 해서 좋았어요."
학교에서 운동부와 일반학생들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체험활동 이벤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NC 다이노스 경기가 있는 날 단체관람을 하고 시구와 시타에도 참여하기 위해 신청을 해보았다.
시구는 교장선생님이 그리고 시타는 야구부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선수 중 한 명을 감독이 추천해서 하는 방식으로 NC다이노스 경기에 이벤트 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날짜가 잡혔다. 2020년 5월 16일로 기억된다. 나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투수의 경험도 있고 꾸준히 한 달에 한 번씩 학생들과 훈련을 하여 시속 100Km 이상의 투구는 자신이 있었다.
아뿔싸~~
당시 코로나가 확산하여 사상초유의 일이 발생한다. 프로야구가 올 스톱 된 것이다. 나와 우리 학생들의 애타는 기다림도 모두 날아갔다.
지금도 당시 초등학교 야구부 12명은 38세가 되면서부터 해마다 설과 추석 때마다 선생님을 모시고 소소한 선물을 드리고 조촐한 사은(師恩) 모임을 한다. 올해가 벌써 24년째이다. 그리고 올 추석에도 사은모임을 하고자 선생님께 전화를 드린다. 전화 속에 선생님께서 답을 하신다.
"네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네, 내가 얼마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지금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한다.
올 추석 사은모임은 요양병원에서 가져야겠다.
흐르는 세월은 쏜살같아서 돌아서면 저만치 가 있다.
야구란 인생과 비슷하다.
홈에서 출발하여 힘겹게 1루를 밟고 2루 3루라는 운동장에 머물며 다시 홈으로 돌아오는 경기이다. 홈으로 다시 잘 돌아와야 이기는 경기이며 이 과정에서 환희를 느낀다. 인생도 태어나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1루, 2루, 3루라는 인생살이에서 멋진 경험을 쌓고서... 선생님께서는 3루에서 홈으로 달려가고 계시는 중이시다.
선생님~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과 자산을 남겨주신 젊은 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