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드니에 갔을 땐 면접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SBS 입사가 확정되고 난 후였지만 다른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길래 한 번 뭔지는 보자는 생각이었다. 간 김에 이사할 집을 알아볼 마음도 있었다. 면접은 그린피스에서 영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운동가는 아니어도 환경보호에는 늘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는 것도 꽤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놀러 간다는 마음으로 다시 시드니에 갔다. 시드니와 멜버른 사이를 이렇게 옆동네 가듯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두 번째 갔을 땐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비행기를 통근하듯 탄다는 게 내 주제에 말이나 되는 일인가?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항공권은 몇 백 불을 하고 공항을 오고 가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을 따지면 무척 소모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행기가 늦거나 아예 취소가 될 때 받는 스트레스도 어머어마할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라도 항공여행은 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항공여행이 끼치는 대기 오염은 또 어떤가? 차가 발명되고 비행기가 발명되고 여행은 쉬워졌다지만 그렇다고 인생은 쉬워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앨리스를 만났다. 앨리스는 한국에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난 누나였다. 앨리스는 처음엔 골드코스트에서 오페어를 하며 지냈다. 그게 6개월이 되자 오페어 집을 떠나야 했고 시드니를 다음 목적지로 잡은 것이었다. 둘이 옛날에 일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며 우린 그때만큼 재밌을 때가 없었다고 추억 팔이를 했다. 앨리스는 시드니에 좋은 브런치 카페를 많이 알고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투박한 게 멋스러운 곳이었다. 메뉴는 커다란 칠판에 손글씨로 빽빽이 쓰여 있었고 가게 뒤에는 무심한 듯하면서 잘 꾸며진 뜰이 있었다. 돌로 된 작은 분수대와 초록색 식물들로 꾸며진 그곳에서 우리는 팬케이크와 부리또 보울을 먹었다. 우리의 수다는 끝이 없어서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겨 계속 떠들어야 했다.
그린피스 면접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고 사무실을 찾아갔다. 나는 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암시를 했지만 면접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은 대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라면 나는 자신감에 넘칠 줄로만 알았다. 그래도 긴장이 됐던 걸 보면 떨어질까 걱정 때문이 아니라 남들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괴롭구나 싶었다. 면접관은 네 명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잘 넘긴 것 같았다. 특히 소재를 던져주며 어떤 식의 영상을 만들고 싶냐고 물었을 때 썩 괜찮은 아이디어를 낸 것 같았다. 석유회사들은 바다에 음파를 쏴서 바닷속 석유를 탐지하곤 하는데 그게 고래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이었고 이 위험을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물어봤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영상 아이디어를 잘 이야기했다. 그러나 면접이 끝나갈 즈음에 그들은 추천인들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결국 그린피스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면접에 떨어지고 나면 언제나 이유가 궁금하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법이었다. 혼자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내 추측은 이랬다. 나는 내 전 직장, 빅토리아 대 흉을 너무 잡은 것 같았다. 면접관들이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빅토리아 대가 잘못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며 내가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 말했다. 나는 그게 내 재능을 홍보하는 거라고 여겼지만 그들에겐 전 직장 불평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전 직장 흉보는 직원은 새 직장에서도 그럴 거고 그런 사람을 원하는 곳은 없었다.
빅토리아 대는 내 모교에 첫 직장이라 애틋함도 있었지만 그만큼 섭섭한 점도 있었다. 나는 학과에서 다소 푸대접을 받으며 공부한 느낌이었고 사무실에선 재능을 활짝 펴지 못한 것 같았다. SBS에 들어갔단 소문이 퍼지자 학교는 나를 자랑스러운 졸업생이라며 홍보물에 등장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마케팅 직원과 이메일 인터뷰를 했고 SBS를 배경으로 찍은 내 사진도 보냈다. 빅토리아 대는 나에게 '기회의 학교'였다고 홍보용 말도 해줬지만 학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을 줬냐고 물었을 때 나는 거의 없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오히려 실망스러웠다고 더 직설을 하려고 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고 마케팅 직원에게 그럼 푸념은 뭣하러 하나 싶기도 했다. 대신 학생 직원으로 일하며 경력도 시작하고 돈도 벌어서 좋았다는 점을 강조해서 직원은 기사를 썼다. 내 사진이 포함된 그 기사는 오늘날까지도 스크린 미디어학과의 성공사례로 두고두고 홍보물에 쓰이고 있다.
나는 정말 학교에서 마땅한 대우를 못 받았을까? 아니면 피해의식이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나 혼자 생각해 보고 진술해볼 뿐이다. 세바스찬은 졸업을 하고 일자리 구하기에 절박해 학교 부서 곳곳으로 정보를 캐고 다녔다. 그동안의 인맥을 다 동원하여 취직을 시도했지만 일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로레알에 들어갔을 때 세바스찬은 태도를 완전히 달리하여 빅토리아 대는 자기 수준에는 너무 낮은 곳이라고 깔보기 시작했다. 저 좋은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깎아내리고 싶어지는 신포도의 심리였다. 세바스찬이 그렇게 변했을 땐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똑같이 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불리하다고 느낄 때마다 살아남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했단 사실이다. 인턴도 더 열심히 알아봐야 했고, 비디오 관련 프로그램들도 더 열심히 배워야 했다. 언어도 잘 안돼서 사람들의 환심을 살 능력도 없으니 실력으로 나를 증명해야 했다. 그게 결국엔 다 도움이 됐다. 조금씩 만들어 차곡차곡 모아놓은 내 영상들은 어느새 포트폴리오가 됐고 프리랜스 일을 지원하거나 어딘가에 구직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적잖은 인상을 줬다. 마크가 나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아 힘들게 한 것도 나를 단련시킨 것이다. 이 모든 고생이 없었다면 SBS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게 참 역설적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에 감사해야 하다니.
그래서 마케팅 직원과 인터뷰를 할 때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인용하고 싶었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이렇게 외쳤다. Thanks for making me a figh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