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했다.
시드니에 이사를 하고 처음 지낸 곳은 에어비앤비였다. 한 커플이 사는 집이었는데 방 하나를 저들이 쓰고 다른 하나를 렌트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파트는 3층으로 된 콘도식 건물에 있었는데 ㄷ자 건물이 가운데 바베큐장, 풀밭, 수영장이 있는 공용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다. 방에서 그 야외가 내려다보였다. 커플은 브라질인 남자와 스페인인 여자였는데 우리가 보기엔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 싶지만 철저히 다른 말이라 그들은 영어로 소통을 했다.
SBS에 출근하는 첫날 경비실에서 사진부터 찍었고 사원증을 만들었다. 내 상사 알리사가 입구에 나와 나를 맞아줬다. 첫날부터 내 컴퓨터가 말썽이었다. 내 사원 아이디가 로그인이 되지 않아서 IT 사람을 불러야 했다. 여러 가지로 쿵떡쿵떡 하는 동안 나는 별로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냈다. 5시에 퇴근을 하려고 준비하니까 SBS에 실망해서 멜버른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한 팀원이 농담을 했다. 부디 내일도 나와달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첫 날을 마쳤다.
우리 팀은 소셜 미디어 부서였는데 나와 같은 직책의 비디오 프로듀서가 셋이 더 있었고 그 상급의 관리자들이 알리사를 포함한 셋이 있었다. 맨 위로 팀장 에이미가 있었다. 알리사는 우리 비디오 프로듀서들을 관리하는 에디터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 매일 아침 우리는 그녀 주변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로 하루를 시작했다. 각자 영상 아이디어를 가져와 알리사의 승인을 받았다. 우리가 만드는 영상은 시사성, 다양성, 재미의 요소가 고루 갖춰야 했다. 시사성이라 함은 성, LGBT, 환경문제, 이민문제, 정신건강, 장애 등 호주에서 활발히 회자되고 있는 주제들을 말했다. 다양성은 백인 외의 문화와 언어의 사람들, 여성들이나 그 외의 성을 가진 사람들, 이민자의 이야기를 뜻했다. 여기에 재미가 더해져야 사람들이 보고 즐기고 공유하는 영상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소셜 미디어의 세계가 그랬다. 아무리 의미와 교훈이 있어도 사람들의 스크롤링을 멈출 수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한동안은 아이디어 회의가 어려웠다.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도 몰랐고 어떤 아이디어가 좋은 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다 재밌는 영상이 있으면 그걸 흉내 내서 만들자고 했다. 알리사는 내 아이디어를 번번이 물리치면서 미안해했다. 결국은 다른 프로듀서들이 낸 아이디어를 내게 할당해야 했다.
내가 제일 처음 만들었던 영상은 재밌게도 한국에 관한 것이었다. 프로듀서 샘의 아이디어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만드는 게 적절하다고 여겨 내게 주어졌다. '견뎌바'라는 이름의 숙취해소 아이스크림이 우리나라 편의점에서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에선 과음 문화만큼 숙취해소의 기술이 발달해 급기야 아이스크림까지 만들어졌다는 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영상에 쓸 사진과 영상은 거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에서 구했다. 특히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는 사진과 영상이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이걸 다운로드하여서 잘라 붙이는 편집을 하면 됐다. 영상편집으로 보자면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는 작업이었다. 다만 영상에 들어갈 카피도 내가 직접 써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 짤막한 기사를 쓰는 격이었다. 비디오 프로듀서라고 해서 촬영과 편집만 하는 줄 알았지 작문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써 주는 사람이 따로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억지로 써낸 카피는 알리사에 의해 대부분 다시 쓰였다. 견뎌바라는 이름을 번역하는 부분이 특히 까다로웠다. '견뎌 봐'라는 말에 아이스크림을 뜻하는 '바'를 붙인 익살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이를 영어로 전달할 재간이 없었다. 다른 영어 기사들을 보니 'Hang In There Ice Cream '이라고 해놔서 그걸 갖다 썼다. 다른 곳에서 쓰인 영어 기사가 있으면 말을 조금 바꿔서 거의 베끼듯 내 영상에 썼다.
견뎌바 영상은 꽤 인기를 끌었다. 재미의 요소가 컸기 때문이었다.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소식이라는 점에서 다양성도 있었다. 시사성은 높지 않았지만 두 가지만 충족해도 영상은 좋은 성과를 냈다. 댓글, 공유, 조회수로 우리는 성공 여부를 판단했다. 특히 조회수 3만을 성공적인 영상의 지점으로 삼았다. 우리가 만든 영상들은 같은 날 저녁에 예약되어 페이스북에 올라갔고 다음날 아침 성과를 이야기했다.
나는 여전히 어떤 아이디어가 좋은 것인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그래도 뭐라도 피칭은 해야 했는데 알리사는 내 사기를 해치지 않으려고 허접한 것들도 받아주는 눈치였다.
알리사는 조금 곱실거리는 긴 금발이었다. 그 머릿결 사이로 튀어나온 귀를 보면 엘프가 떠올랐다. 알리사에겐 수양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 제임스는 막 배변훈련을 떼고 아이언맨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수양딸 로라는 영국인 남편의 친딸이었다. 알리사는 매일 아침 일찍 제임스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8시면 사무실에 나왔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자기 어머니와 긴 안부 통화를 하곤 했다. 아직 사람들이 나오지 않은 고요한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두런두런 거리는 알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디오 프로듀서는 나, 샤미, 샘, 클로이가 있었다. 샤미는 인도계 호주 사람이었다. 샤미만큼 또렷한 큰 눈과, 짙은 눈썹과, 풍성한 머리를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샤미는 버즈피드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는데 트위터 계정에는 파란색 체크 마크도 있었다. SBS에서 소셜 미디어 영상이란 걸 처음 만든 사람이 샤미였다. 소셜 미디어 추세가 그런 종류의 영상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때라 소셜 미디어 프로듀서가 네 명이나 늘어난 것이었다. 샤미는 글 쓰는 재주도, 편집하는 재주도 좋았다. 콘텐츠 하나를 혼자서 책임지고 만드는 일은 버즈피드에서부터 익숙했던 것이다.
샘은 마르고, 늘씬하고, 언제나 꽁해 있는 듯한 친구였다. 나보다 더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아침 회의 때를 빼면 하루 종일 헤드폰을 끼고 앉아 다른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어쩔 땐 반사회 성향이 거의 병의 수준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춘기 10대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우리 팀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학교에서 조용하지만 인기 있던 아이의 유형이었다. 자기는 주변에 별 관심 없는데 괜히 존재감이 있고 사람들이 먼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쿨한 애 같은 캐릭터였다.
클로이는 '올해의 LGBT 언론인 상' 같은 걸 받은 적도 있다는 기자였는데 글보다 영상이 인기가 더 많아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비디오 프로듀서가 된 것 같았다. 편집 능력은 아주 기초적 수준이었다. 알리사가 일을 쉬거나 다른 업무로 바쁠 때면 클로이가 아이디어 회의를 이끌거나 카피를 봐주기도 했다.
클로이는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LGBT 이슈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있다길래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이성애자쯤으로 생각했는데 양성애자였단 것을 알고는 속으로 뜨끔했다. 클로이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단 이유만으로 이성애자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LGBT 커뮤니티 내에서도 그렇게 양성애자들을 향한 차별이 있었다. 분명한 성소수자지만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는 진위를 의심받곤 했다.
클로이를 보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떠올랐다. 생김새가 꼭 닮은 건 아니었지만 항상 어딘가 아픈듯한 창백한 피부와 거무튀튀한 눈밑만은 그랬다. 클로이는 실제로도 아픈 사람이었다. 만성통증이 있다고 했다.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수수께끼의 병이라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이었다. 그게 도지는 날은 재택근무를 하거나 아예 일을 쉬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랬다.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하는 날은 산송장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뭐라도 찍어 발라야 사람처럼 보인다며 급하게 얼굴을 두드리고 왔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녀에게 좋아 보인다고도, 나빠 보인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쪽도 클로이에겐 불필요한 말이었다.
병 덕분에 클로이의 몸매는 가냘팠다. 그래서 모델로도 활동을 조금 하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Your figure is sick"이라고 몸매 칭찬을 한다고 했다. 이 맥락에서 'Sick'은 '최고다'와 같은 뜻인데 클로이는 정말로 '아팠다'. 병약미는 그렇게 인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