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네.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기보다 내 속에 있는 뭔가 강한 충동이 그렇게 한 거지. (...)"
예술은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해하기 위해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순간 예술 자체로의 가치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본작은 예술의 충동을 긍정한다. 작가는 의도를 일차원적으로 미화하거나 단편적인 서술로 일반화시키지는 않았으나, 순수한 충동을 그대로 그려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찰스 스트릭랜드'는 인격적으로 존중받을 위인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예술 충동에 이끌려 17년을 같이 산 부인과 어린 자식 둘을 버리고 떠난 이를 과연 누가 좋은 말로 포장해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일방적인 비난의 말로 '찰스 스트릭랜드'의 모든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 삶은 예술에 다가가기 위한 도전이었고, 찬란한 실패였다.
'찰스 스트릭랜드', '르네 브뤼노', '야타', '아브라함' 이들의 공통점은 순수한 열망에 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본작 제목의 '달'과 '6펜스 은화' 중 '달'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알렉 카마이클', '에이미 스트릭랜드', '더크 스트로브', '블란치 스트로브'는 외적이 요소, 타인의 시선, 자신의 평판 등을 우선시한다. '6펜스 은화'에 가까운 인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사실상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작품을 둘로 나누고 이해하는 순간 들리지 않는다. 작가는 무비판적인 수용을 반대한다. A라는 사실이 있다면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보다는 "왜?"라고 반문하며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본작에는 정답 같은 인물은 없다. 본인의 희대 역작을 그리고 죽은 다음 태워달라 부탁한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우리 모두 결점을 지니고 있다.
"난 과거를 생각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현재는 반복된다.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가 떠오르는 말이다. 반복되는 현재가 너무 가볍다면, 무게를 더해볼 필요가 있다. 생각을 조금 더 무겁게, 스스로 되물어 보고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똑같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누구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자기표현 방식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다면, 영원히 반복되는 현재에 갇혀버릴 수 있다. 우리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 타히티섬으로 훌쩍 떠난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형이상학적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용기도 조금은 필요하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본작의 문장 중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산재하는 수많은 의견은 인간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감히 누가 삶을 평가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을 나눌 절대적 기준이란 게 정말 있을까? 인생을 살아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생을 일궈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고고한 흔적이자 결과이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민음사
작가 : 서머싯 몸
옮긴이 : 송무
-참고 자료
마순영, 폴 고갱의 '원시주의'에 대한 재고, 2011
김영지, 광기가 낳은 비극의 예술 - 『달과 6펜스』와 「광염소나타」를 중심으로,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