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용 Apr 17. 2023

삶, 죽음과의 공존

노르웨이의 숲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들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어떤 이들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더 익숙할 것이다. 1988년에 이미 본작은 “노르웨이의 숲”, “개똥벌레 연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지만, 판매량이 저조했다. 이듬해 문학사상사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재출시했고, 해당 번역본이 베스트셀러가 돼 우리나라에서는 졸지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도 좋다고 생각한다. 원작자가 지은 제목을 멋대로 바꾼 것은 섣불리 옹호할 수 없는 행위지만, 나름 잘 현지화한 사례로 손꼽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Y_V6y1ZCg_8


 당시 본작 제목에 영향을 준 비틀즈의 동명 원곡이 오랫동안 한국에서 금지곡이었기에 국내 독자들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에 대한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또, 죽음이라는 상실로 삶을 채운 인물의 연대기, 그 개인의 시대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도 제목과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과 어울린다 생각하는 것이 그 이유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p55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p56


 주인공 와타나베는 여러 죽음을 마주쳤다. 그 모든 죽음은 와타나베의 삶에 크고 작은 반점으로 남았다. 특히, 어릴 적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기즈키와 끝까지 마음을 얻지 못했던 나오코의 죽음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어이, 일어나, 나 아직 여기 있다니까, 일어나, 일어나서 알아내라고, 내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p14

 

 본작은 이미 시간이 흘러 과거를 회상하는 와타나베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때 “나”는 와타나베에게 존재 이유를 묻는다. “나”는 와타나베를 여기까지 끌고 온 흔적, 즉 기즈키, 나오코를 비롯한 그들의 죽음에서 파생된 반점이다. 사실 단순한 반점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년이 지난 후에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무엇인가를 고작 반점 따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오코는 나랑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p24

 와타나베가 깨달은 진실은 잔혹했다. 와타나베가 아무리 나오코에게 헌신했어도, 순간적으로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도, 결국 나오코는 오래전 죽은 기즈키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건넨 손길은 결국 나오코에게 닿지 못했다.      


 왜 밤에는 국기를 내리는 것일까, … 그렇게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든다. p30

 삶은 공평하지 않다. 이미 밤이 찾아온 이상, 낮에 일한 사람만큼 일해도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삶은 공평하지 않다. 나오코 마음에 기즈키만이 가득했던 것은, 기즈키는 나오코의 낮에 찾아가서였을 수도 있다. 단순히 와타나베는 이미 늦어버린 밤에, 마음이 닫혀버린 다음 찾아갔기에 나오코에게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여자들과 자면서도 늘 나오코를 생각했다. … 그런 것들을 생각할수록 내 몸은 더욱 굶주림과 목마름에 떨었다. p93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p111


 와타나베는 실망이 두려웠다. 기즈키와 나오코가 남긴 흔적은 이러한 형태, 새로운 사람을 둘 자리 하나 안 남길 만큼 거대한 형태로, 와타나베에게 오래 남아 있었다.

 

 와타나베 대학 후배 미도리는 생기로운 생명력을 가득 품고 와타나베에게 다가갔으나, 비좁은 틈바구니를 파고들지 못했다. 이는 미도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와타나베가 미도리와 가까워질수록 나오코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더 명료하게 되돌아봤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면 어떻게 되는 거죠?” … “회복하는 거지.” 그녀는 말했다. p206


 나오코의 정신병동 룸메이트인 레이코는 와타나베가 보기에는 성숙한 여성이었다. 레이코는 와타나베와 나오코 사이에서 조언과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 의지만 있으면 빠져나올 수 있는 특별한 정신병동에서 7년 동안 퇴원하지 못했지만, 레이코는 와타나베와 나오코 입장에서는 어른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때로 나는 정말 슬퍼져. … 내가 마치 깊은 숲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춥고 외롭고, 그리고 캄캄한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아. …” p223


 대사 속 “이 노래”는 “Norwegian Wood”로, 비틀즈가 65년도에 내놓은 앨범 러버 소울(Rubber Soul)의 수록곡이다.     


전에 여자가 있었는데,
아니면, 그녀가 한때 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녀는 나에게 그녀의 방을 보여주었습니다,
좋지 않나, Norwegian Wood?
그녀는 나에게 머무르라고 했습니다
아무 데나 앉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의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양탄자 위에 앉아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와인을 마시기
2시까지 얘기를 나눴는데 그녀가 그러더군요,
"잘 시간입니다."
그녀는 나에게 그녀가 일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침에 그리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난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욕조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기어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습니다,
이 새는 날았습니다
그래서 불을 지폈는데, 좋지 않나요,
Norwegian Wood?     
비틀즈 - Norwegian Wood 가사, 파파고 번역.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459&cid=42596&categoryId=42596


 95년도 번역본은 노르웨이 숲이라 돼 있지만, 현재는 본 가사가 “노르웨이산 가구”를 칭한다는 것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혀진 정설이다. 노래는 홀로 남은 이의 씁쓸한 감정을 대변한다. 마지막 가사에 노르웨이산 가구 하나, 어쩌면 집 전체를 불태웠다는 내용은 노래 분위기에 비해 다소 과격한 편이다.     


 노래 내용을 다시 짚어보자면, ‘한 남자가 한 여인과 밤을 보내기 위해 그 여인의 집으로 갔는데, 한껏 노르웨이산 가구를 칭찬하던 그녀는 남자를 침대는커녕 욕조에서 재웠다. 남자가 잠에서 깼을 때, 여자는 없었고, 남자는 그녀가 칭찬했던 노르웨이산 가구에 불을 질렀다.’     


 나오코는 노래를 들으면 슬프다고 했다. 허나 차라리 나오코가 그저 감상에 빠지지 않고 노래 속 남자처럼 행동했다면, 그 모든 기즈키와 함께 꾸몄던 과거, 모든 것이었던 세상을 불태워 버렸다면, 나오코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우린 세상에 빚을 갚아야만 했을 테니까.” …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우리는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야. …” 261p


 나오코의 세상은 모두 기즈키였다. 이는 기즈키에게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에게만 호환되는 구식 제품처럼, 나오코와 기즈키는 둘 이외의 것에 접속하지 못했다. 그 어린 시절, 와타나베는 둘의 구원자처럼 나타났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기즈키가 예속돼 있는 세상과 외부 세상의 유일한 가교였다.     


 “비참한 이야기지. 우리 그렇게 고생하면서 온갖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쌓아 올렸는데. 무너질 때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어. 번쩍, 하더니 모든 것이 무너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p323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정신병동에 들어온 계기를 덤덤히 풀어냈다. 순간의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완벽한 덫에 걸려버렸던 레이코는 그 말마따나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나오코도 마찬가지다. 병문안을 오는 와타나베에게 조금씩 기대며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던 나오코가 정말 한순간에 세상을 등진 것은, 그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있다.’ p529


 우리네 삶 기저에는 죽음이 깔려있다. ‘나’의 죽음, ‘나’를 둘러싼 다른 이들의 죽음, ‘나’와는 완벽한 남이어도 영향을 주는 어떤 죽음, 죽음 속에 파묻혀 생을 바라는 인간이라니, 인생이란 참 역설적인 과정이다.


 본작은 연애소설이지만, 사랑이 부재한다. 유일하게 서로에게 우주가 되어주었던 나오코와 기즈키만이 사랑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은 일방적으로 다가가기만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감정적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사랑이 박동하지 않는 연애소설은 이미 죽어있는, 불완전한 세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죽음 속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은 숨 쉬며 버텨낸다.


 “… 우리(우리라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하나로 묶은 총칭이에요.)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이에요. …” p521


 그렇게 불완전한 세계를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그럴 것이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민음사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옮긴이 : 양억관     


-참고 자료     

 정인영,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소설의 한국어 번역양상 비교연구 試論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중심으로-, 2009.     

 이혜인, 『노르웨이의 숲(ノ ル ウ ェ イ の 森)』론- 기즈키를 통해 보는 죽은 자의 상실감을 중심으로 -, 2015.     

 강윤경,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론 - 등장인물들의 자폐적 성향을 중심으로 -, 2022.               


작가의 이전글 단죄의 달콤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