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구간 3
감포.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감은포, 줄여서 감포다. 또 지형지세가 달 감(甘) 자와 닮아서 감포(甘浦)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1937년 옛 양북면 (현 문무대왕면)의 해안 지역 9개 리가 분리되어 감포읍이 되었다. 읍 소재지는 감포항이 있는 감포리이다. 감포항은 경주 최대의 항구로 올해 개항 100주년을 맞았다.
해파랑길 12코스는 감포항에서 시작한다. 감포항의 주요 어종은 가자미, 가오리, 오징어, 복어, 아귀, 꽁치 등이다. 부두를 따라 돌며 감포의 명물 참가자미 횟집이 즐비하다. 식도락가 강 선생은 해운대횟집 아귀탕을 추천한다.
쉴 사이 없이 고깃배들이 드나든다. 감포항은 1920년대 개항한 후 일본인 어부들이 이주하여 어촌이 형성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가장 번화했던 거리인 (수협과 제빙 냉동공장 사이의) 선창은 시간이 멈춘 곳이다.
지금도 중앙통이다. 가고파다방, 항구다방, 정다방, 여정다방, 금빛다방... 커피이야기라는 현대식 카페가 한 군데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모두 다방이란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운 모닝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활어 위판장에서 낙찰받은 신선한 생선을 거래했을 법한 다방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어판장 뒤편, 감포로 건너 대로변에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층 건물이 늘어서 있다. 창틀이 새시로 바뀌고, 출입문을 개조했지만 지붕 아래 빗물받이, 창문 위의 눈썹지붕, 큰 창문 아래 작은 창문 등 일본식 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어민이 살던 소위 적산가옥이다.
<감포깍지길>의 작가 주인석은 '적산가옥'이란 말이 싫었다고 한다. ‘되찾는다’, ‘회복하다’라는 의미의 순우리말 ‘다물’을 가져와 적산가옥을 '다물은집'이라고 했다. 일본인의 재산이 아니라 일본인이 물러간 후 ‘되찾은 재산’이란 이야기다.
다물은집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거리에서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참가자미 회와 함께 멸치볶음, 톳과 미역줄기 무침, 꽁치와 가자미 구이 등을 밑반찬으로 내놓은 ‘주주(酒主)총회' 식당의 밥상은 바다 내음 물씬 풍긴다.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
이른 새벽 어판장에서 경매를 마치고 술국으로 해장하던 골목, 대끼리 소주방이 손님을 부른다.
"뭣이든 다 해드릴 테니 퍼뜩 오이소."
긴 이름의 한국국제통상마이스터고등학교가 언덕 위에서 항구를 내려다본다. 선창에 감은사 삼층석탑을 형상화한 활어직판장이 있다. 이층은 초장집이다. 경주 천년의 바다, 천년의 향기는 결국 천년의 맛으로 귀결된다. 기름가자미. 자연산 활 참전복. 대형 상가 옆의 작은 가게들이 더 눈에 띈다.
"다 퍼 주고 또 잡자."
‘멀쩡한 원자력발전소 조기 폐쇄’,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월성원전을 안고 사는 감포.
"풍요로운 바다, 살기 좋은 어촌 건설 / 깨끗한 바다, 신선한 수산물 원자력과 함께" _ 경주시 수협 제빙 냉동공장 외벽에 걸린 격문
"감포읍은 월성 2,3,4호기 계속 운전을 응원합니다" _ 감포 가자미 축제장에 걸렸던 현수막
곳곳에서 이 지역의 고민이 묻어난다. 얼마 전 끝난 대선에서 감포 주민은 원전 우호세력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주민의 생각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수협 활어위판장 뒤 마을, 넘실대는 파도가 그려진 골목을 들어선다. 꽃밭이다.
'게으름뱅이' 송엽국과 '깊은 애정'을 품은 분홍낮달맞이꽃은 아침에 피고 저녁에 닫히기를 반복한다. '꿈속의 사랑' 돈나무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애절한 사랑' 접시꽃이 길가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아내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한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을 떠올린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 들어야 함을 압니다.
도종환, <접시꽃 당신>에서
감포항이 내려다보이는 북측 언덕이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곳이라던 전망 좋은 곳의 리조트도 코로나펜데믹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입구에 '매매' 안내문이 붙었다.
송대말(松臺末). 마을 이름이 아니다.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다.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돌출된 언덕 끝, 200~300년 동안 감포를 지킨 아름드리 해송이 숲을 이룬 곳이다. 감포 앞바다는 암초지대이다. 해난사고가 잦았다.
1955년 등대가 생겼다. 1964년 유인등대로 전환했고, 2001년엔 한옥 지붕에 ‘감은사지 3층 석탑’을 올린 새 등대를 건립했다. 한옥은 빛 체험 전시관이고, 석탑 모양을 한 등대에서 불을 비춘다. 옆의 옛 송대말등대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은 채 외형만 남았다.
송대말은 일출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솔숲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동해 일출은 장관이다. 하얀 옛 등대와 삼층석탑등대, 먼바다를 지키는 노란 갑방돌등대를 붉게 물들이는 일출은 솔숲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기막힌 대비를 연출한다.
송대말에서 바로 아래, 주상절리 암괴를 시멘트로 연결하여 바닷물을 담은 곳이 보인다. 해송이 우거진 절경의 송대말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리나 감포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유흥을 즐기던 곳이다. 시멘트 구조물 흔적은 송대말에 있던 고급 요정의 천연 수족관이었다. 물고기를 가두어 키우는 축양장으로 손님이 들면 잡아 올려 싱싱한 해물로 요리를 하였다고 한다.
감포항 방파제 하얀 등대를 송대말에서 내려다본다. 두 면을 감은사지 삼층석탑 형상을 음각으로 뚫어 그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기와지붕 위에 석탑을 올린 어색한 송대말등대보다 석탑을 음각한 방파제 등대가 더 돋보인다.
송대말을 내려서면 바위산이 해안 도로를 바짝 쪼인다. 좁다란 척사길 담장과 옹벽에 벽화가 빼곡하다. 사진을 찍으라고 옹벽 위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리를 비켜준다. 거북이 옹벽을 뚫고 나온다. 바위에 올라선 게가 집게손을 높이 쳐든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바다를 지킨다.
척사(尺紗)마을
백사장의 모양이 길게 펼쳐놓은 비단을 자로 잰 듯하다고 해서 척사(尺紗)라고 하는데, 마을 해변의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고 하여 장사(長沙)라고도 불렀다. 척사마을에는 유독 민박집이 많다. 해변민박을 시작으로 독도민박, 파도소리 들리는 민박, ○○민박 ...... 간혹 펜션도 보이지만 한집 건너 민박집이다.
옛날 행세 깨나하던 이가 살던 대궐 같은 한옥, 요즘 돈깨나 있는 사람이 사는 멋을 부린 전원주택, 슬레이트 집, 기와집, 사각형 슬래브 집이 건축연대를 초월하여 함께 마을을 만든다.
척사항을 지나간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본떠서 만든 빨간 등대가 도드라진다. 매일 정오와 오후 6시에 40초간 울리는 '에밀레종'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등대는 드라마 <꼭두의 계절>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척사길은 창바위길로 이어진다. 창(槍)바위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앞바다에는 암초가 많다. 물 위로 솟아오른 바위에 갈매기가 논다. 바위는 척사길까지 뛰어오른다. 해산물을 다듬고 있는 어느 집 바로 코앞도 커다란 바위가 앉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바윗덩어리를 차들은 피해서 다닌다.
솔내음 짙은 오류고아라해변
차바위길이 끝나고 오류고아라해변에 닿으면 솔내음이 바람을 타고 코를 스친다. 방풍림으로 심은 소나무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자란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고운 모래와 몽돌이 섞여 있는 오류고아라해변의 소나무 숲은 야영장이다. 차박이 가능한 넓은 오토캠핑장과 여러 채의 카라반을 갖추고 있다.
모래사장과 솔숲 사이는 긴 산책길이다. 모래사장에 몇 그루 야자수가 뜬금없이 서 있다.
해변의 조망할 수 없을 만큼 칡넝쿨이 뒤덮인 31번 국도와 해변 마을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연동마을로 간다. 연동마을은 고려 말엽 성씨가 다른 세 집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고 한다. 마을 뒤 연못에 연꽃이 많아서 연동이 되었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 염전이 있던 마을이라 염동이라 부르던 것이 연동이 되었다기도 한다.
봉길해변부터 함께 걷던 감포깍지길 1코스는 감포읍 오류 4리 연동마을회관을 끝으로 헤어진다. 경주시 감포읍과도 헤어진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두원리로 들어선다. 해안마을의 풍경은 감포읍과 다르다. 방파제가 사람 키높이보다 높다. 재난훈련 방송이 계속된다. 창고 건물에 희미하게 남은 격문이 이곳 정서를 가늠케 한다.
"남몰래 고민 말고, 자수하여 편히 살자."
두원방파제를 지나서 선돌전망대까지 2킬로미터 구간은 대부분 해변의 모래와 자갈을 밟고 걷는다. 걷기가 매우 불편하다. 13킬로미터의 비교적 짧은 코스인데 5시간이 소요된다는 두루누비의 안내가 이제 이해된다.
해변의 황톳빛 바위와 바위섬, 31번 국도 위의 언덕에서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들꽃이 수놓은 해안마을이 아름다운 길이다. 큰금계국, 갯무가 해풍에 흔들린다.
돌가시나무(땅찔레)가 쟁반 같은 흰 꽃을 피우며 자갈밭을 긴다. 파도에서 나오는 작은 물 입자와 아주 미세하게 들어있는 염기를 좋아하는 모래지치가 '섬 마을 소녀'처럼 청초한 모습을 드러낸다. 환경부 지정 생태교란식물인 환삼덩굴이 '엄마의 손'과 같이 관리 영역을 넓혀 간다.
해국, 기린초, 등대풀, 갯메꽃, 참골무꽃...... 카메라 든 손이 점점 바빠진다.
선돌곶
선돌곶은 장기면 계원리로 넘어가는 바위 언덕에 꼿꼿이 서있다. 꼭대기에 앉았던 갈매기가 카메라를 대니 날아간다. 원래 선돌은 인위적으로 반듯하게 세운 돌을 이른다. 자연적으로 생겼지만 마치 인간의 의지로 세운 것 같다.
선돌곶 전망대는 소봉대도 보이는 곳으로 해안 경관이 빼어나다. 거센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 이는 하얀 물보라, 해질녘 노을에 물든 고깃배, 들꽃과 노송이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이다.
계원 2리에서 거북이 바다로 향하는 모습을 한 소봉대를 만난다. 작은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소봉대인데 천하제일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다. 한 낚시꾼은 너스레를 떤다.
"소봉대요, 귀한 감성돔과 농어, 무늬오징어가 줄줄이 올라옵니다. 무엇을 낚을까가 고민이지요."
폐교를 지나 대숲이 우거진 골목을 내려선다. 계원마을이다. 길가에 검은색 젓갈 발효통이 늘어서 있다.
이제 31번 국도를 따라 양포교까지 차도와 함께 간다. 보통 국도는 마을보다 높은 곳에 있다. 지나가는 차에 신경이 쓰이지만 양포항을 빤히 바라보고 걷는 길은 그렇게 나쁘진 않다. 종착지가 가까워진다는 희망에 발걸음이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