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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정한 온도 Jun 15. 2022

12년만의 첫 휴직. 나는 비생산적으로 살기로 했다.






    휴직을 했다. 기간은 3개월. 공식적인 휴직의 사유는 병가 휴직. 12년동안 쉼없이 (1년마다 주어지는 연차와 11년 전에 수술받기 위해 쉬었던 1개월 병가 휴직 빼고) 회사를 다닌 댓가로 나는 목디스크를 얻었고, 일자목이 되어버린 몸뚱이를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당분간 회사를 쉬기로 했다. 휴직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나에게 결코 쉬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려웠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던 숫자가 줄어든다는 사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커리어를 잠시 멈춰도 되는건지, 끊임없이 되묻던 뼛속까지 자리잡힌 노예 근성이, 남들도 힘들게 돈 버는데 나만 유난떠는것 같이 느껴지게 하던, 되도 않던 죄책감이 휴직하겠다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는것을 오래된 소화불량처럼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휴직결정_소화불량의 검은피를 따준 건, 슬프게도 더 이상은 못 버틸것 같은 나 자신이었다.


    휴직을 결정하고 나니, 요즘 유행하는 MBTI에서 고민과 불안의 대명사인 인프피답게 또 다른 걱정이 새록새록 꿈틀대기 시작했다. 휴직이 끝나고 났을때 뭔가 하나라도 내가 달라져있지 않으면, 그 모습이 견디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3개월 후 달라진 나의 모습이 이직에 성공한 모습이든, 아니면 새롭게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이든, 그것도 아니면 하다 못해 일취월장한 영어 실력이나 재태크로 꽤나 늘어난 자산이든 뭐라도 하나 지금과 달라져 있지 않으면 3개월이라는 시간을 허투루 쓴 것 같아 자책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모처럼 찾아온, 평온할 수 있는 시간을 내 스스로가 창조해낸 압박과 부담을 스스로에게 지우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최근 몇년 동안 나는 내 삶에서 생산성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를 잘 진행시켜 직장에서의 생산성을 높이고자 했고, 일 외 적으로는 주식이나 부동산을 공부해 자산 증식의 생산성을 얻으려고 했다. 또 사이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해 유명해지거나 부수입도 짭짤하게 얻는 생산성을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생산성을 추구해서 그 모든걸 다 얻었느냐고? 글쎄, 그랬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암울한 문장들로 화면을 채우고 있지 않지 않을까. 생산성을 추구하는 나의 애티튜드는 나에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해주었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그 목표가 적절한 목표였는지 체크한 적은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목표들은 나에게 너무 멀고 높은 곳이었고, 나에게 짙게 드리운 목표들의 그림자는 꽤나 많이 버거웠다. 어쩌면 내가 나의 라이프에서 생산성을 덜 추구했더라면 나는 덜 힘들지 않았을까? 왜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스스로 힘겨워했을까?

    

    휴직을 앞두고 또다시 생산적인 아웃풋을 내야한다는 생각에 빠진 내 모습이 사뭇 가여워졌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나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휴직 기간동안 아무것도 안 이루어도 된다고.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비생산적으로 살자고.


    생산성을 떠받드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에서 비생산적으로 살자는 말은 어느 철없는 이상주의자의 안일한 외침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쳤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루져 취급하는 유튜브의 건방진 썸네일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준비하라는 세상의 진정성 없는 훈계에. 지금의 나에게는 바퀴를 굴리는 일보다 굴러가는 바퀴를 멈추는 용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용기. 나에게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도 요구하지 않을 용기 말이다.


    하루 이틀 '생산성을 추구하는 비생산적 근면성'을 삶의 가치에 두고 살아온 것이 아니니까, 비생산적 라이프를 지향하는 삶으로 하루 아침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워 있으면서  "이렇게 가만 있어도 되나?",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침대 스프링을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한 번 해보려 한다. 3개월 후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을 살아보려 한다.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삶. 무엇이 되어 있지 않아도, 무엇을 꼭 하지 않아도 그것대로 좋은 삶. 그 속에서 그저 내가 세상 가장 마음 편한 나로 있을 수 있기를. 무위도식 한량의 삶을 이제야 한번쯤 진정으로 즐겨볼 수 있기를 대충 빌어본다. 나의 비생산적인 휴직 라이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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