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아노 May 10. 2024

아플 자유

한 알 한 걸음 그리고 한 글자

* 모 언론사 공모전에서 당선되지 못했던 글을 올립니다. 

 지난 목요일 코로나19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고(이게 아직도 유행한다고?), 다음으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두 번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 나 사표 냈지. 회사에 죄송하다고 안 빌어도 되겠다.

 앓아누울 때마다 생각해 본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할 일을 하러 일어나 앉는 게 맞을까, 아니면 지금의 통증이 가라앉고 조금이라도 맨정신에 가까워질 때까지 기약 없이 누워있는 게 맞을까. 물론 선택지는 없다. 선택할 시간조차 없다는 게 맞겠다. 진통제와 처방약을 아무렇게나 삼키고 자리에 다시 앉는다. 코로나19로 인해 질병에 대한 시선이 다소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병가를 낸다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과 능력 부족의 지표가 된다. 그날 내가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어떻게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무리를 조금 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구나, 와 무리를 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우리가 얼마나 '단기간에, 빡세게' 노력했는지를 갈구하는, 시성비를 철저히 따지는 사회에서 가심비는 물론이거니와 가성비를 따질 여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길을 걷기만 해도 되니 다른 예시를 드는 것 또한 간단하다. 지하철역마다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단기간 내에 취업 혹은 합격을 보장한다는 광고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 마치 지원자의 조급함을 틀어쥐고 장사와 겁박을 동시에 하는 것 같다. 여기서 ‘단기간’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지원자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선택할 때는 교육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기를 경계하고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사유가 무엇이든, 사회는 절대로 시간상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백기가 채 1개월이 넘어가지 않았던 때,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그동안 뭐 했어요’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회사는 없었다. 겨우 그 정도의 휴식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건가요. 나 역시 입원치료를 했으며, ‘보다 건강해진 몸’이 회사에 이바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내게는 필수적이었던 약 한 달의 시간을 변명하고 정당화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추가적으로 필요한 통원치료를 받으며 그 이상의 공백기를 감수하기에는 첫 취업을 준비했을 당시의 기억이 나를 괴롭혔다.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야’라는 혼잣말을 가장한 타박을 다시 마주할 힘은 없었다. 

 시성비가 가성비와 가심비로 탈바꿈하는, 일종의 ‘정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경우는 종종 있었다. ‘아직 부여잡을 정신이 있을 만큼만’ 아픈 경우에는 '시간을 벌기 위해' 병원에서 수액을 맞으면서 시간을 썼다. 며칠을 더 앓아눕느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히지, 만족스러운 소비였어. 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비슷한 핑계를 대고 ‘오쏘몰 이뮨’(오쏘몰은 너무 비싸므로 지금은 국내산 비타민을 복용 중이다)을 애용 겸 남용하기도 했다. 하루에 두 병씩 비타민을 먹으며 한 달을 버티자 올리브영에서 가장 상위의 멤버십 등급을 차지하게 되었다. 응급실에 가야 했던 날에는 중간고사 최종 대비를 하다 시험 시간에 맞춰 퇴원을 요청했다. 한 손으로는 네뷸라이저를 이용해 호흡하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펜을 잡고 토플 문제집을 풀기도 했다. 어떻게든 주어진 시간 내에 남는 체력과 정신력을 쥐어짜려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나를 지배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말을(문자 그대로에 불과하지만) 빌리면,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우리 개인에게 시성비라는 말이 과연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MZ 세대의 고질병인)타임푸어로 살아가다 보면 시성비라는 개념은 당연하게 체화되기 때문이다. 후크 선장이나 시계토끼와 같이 우리는 초침 소리에 떨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시성비를 따지며 일종의 이득을 얻는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시성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지 못하면 우리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지므로.

* 이 공모전에서 내가 바랐던 것은 지면으로 피드백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운좋게도 그것을 이뤄낼 수 있었다. 당선자의 글 다음으로 내 글이 소개된 것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본다. 내게 주어진 피드백을 첨부한다. 

:아플 자유도 없이 일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 000(필명)씨의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