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친구와 강남역 주변을 걷고 있었다. 무신론자였던 그 친구는 지금 시대에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나타냈다. 그 물음의 저의는 기독교는 비과학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의 열띤 토론으로 변해갔다. 얼굴이 더 붉어질 찰나 우리는 다행히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계몽되어야 할 존재일까?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나와 내 친구만의 것은 아닐 것 같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우리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와 비슷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민감한 대화를 피하기 위해 속으로 생각만 했거나.
과학의 편에 선 사람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 과학과 기독교는 대립한다. 둘, 과학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셋, 과학은 신앙보다 위에 있다. 과연 사실일까? 최근 읽은 책들에 기대어 내가 가진 신앙을 변호해보고자 한다.
성경적 세계관과 근대과학의 발흥에는 큰 연관성이 있다. 선구적 과학자들은 이 세계를 창조한 '법제자'(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이 믿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들을 연구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이 세계가 시간 곱하기 우연의 산물이 아닌 지적 존재의 정교한 창조물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그들의 이성적 연구활동의 근간이 된 것이다.
갈릴레오, 케플러, 파스칼, 보일, 페러데이, 클러크 맥스웰과 같은 위대한 근대 과학자들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의 신앙과 연구 간에는 충돌이 없었다.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한 요하네스 케플러는 “외부 세계에 대한 모든 조사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이 부과하신 합리적 질서, 그분이 수학의 언어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근대 과학자들조차도 기독교가 만든 사상 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우주가 이성적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 위에서 관찰과 실험으로 세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프린스턴 연구소장이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 두 사람 모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근대과학이 기독교 세계관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했다.
기독교와 근대과학의 발흥간의 연관성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대립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지난 백년간 (1901년-2000년) 노벨상 수상자의 육십 퍼센트 이상은 기독교인이었다. 우리는 이들이 신앙과 과학의 대립으로 어느 한쪽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인간이 과학적이 된 것은 자연 속의 법을 기대했기 때문이고, 그들이 자연 속의 법을 기대한 것은 입법자를 믿었기 때문이다.” (C.S 루이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신을 두는 것을 ‘간극의 신’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번개를 이해하지 못해 그 간극을 번개의 신 제우스로 매웠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며 현대인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현대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간극의 신의 범주에 두며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설 자리를 잃어갈 것이라는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이작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이제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찾았으니 하나님이 필요 없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법칙이 창조주 하나님의 설계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과학 법칙의 발견이 그 법을 만든 법제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와 방식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이 우주를 그렇게 설계한 초월적 지성의 창조자, ‘감격의 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교하거나 아름다운 인공물을 보게 되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재능과 탁월함을 생각한다. 우리는 모네가 그린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거나 보잉이 설계한 비행기의 원리를 알게 되면 그들의 솜씨와 지성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천문학자 앨런 샌디지와 같은 많은 과학자들이 이 세계와 우주를 연구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오십년이 넘게 무신론자로 살다 회심한 철학자 안토니 플루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생물학자들의 DNA조사는, 생명의 생산에 필요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배열을 감안하면 지성이 개입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통계학적 결과 또한 생물학적 복잡성과 미세조정된 우주는 지금까지의 시간이 흘렀어도 순수한 우연으로 만들어 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
과학은 이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일에 큰 축을 담당해 왔다. 이제는 인간복제와 같은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며 그 한계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과학 하나만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은 정말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줄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에 대해 옥스퍼드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존 레녹스는 과학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숙모 마틸다와 케잌’이라는 예화를 제시한다.
“나의 숙모 마틸다가 케익을 구웠는데, 우리가 그것을 분석하도록 정상급 과학자 그룹에 제출했다고 상상해 보자. 생화학자들은 그 성분에 포함된 단백질과 지방 등의 구조에 관해 알려줄 것이다. 화학자들은 케익에 내포된 요소들에 관해 알려주리라. 물리학자들은 기본적인 분자들의 견지에서 케익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분명히 그 분자들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정밀한 방정식 한 세트를 내놓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케익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그 케익이 왜 만들어졌는지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마틸다가 싱긋이 웃는다. 그녀가 케익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해답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세계 최상급 과학자들이 아무리 조사해도 그녀가 왜 그것을 만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녀가 그 해답을 밝히기 전에는 그들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전광식 교수는 과학의 한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과학은 여전히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물음에는 아무런 답변을 던지지 못한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삶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며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답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은 종종 전능자의 흉내를 내지만 우리 마음의 번뇌를 지우거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씻을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를 육체의 안락함과 삶의 재미로 이끌지 몰라도, 영혼의 희열과 삶의 평화로는 이끌지 못한다.” (전광식)
과학에 편에 선 내 친구와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대답으로 글을 끝 맺으려 한다. 하나, 과학과 기독교는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적 세계관은 과학발전의 큰 원동력이었다. 둘, 과학의 발전은 하나님의 존재 증거와 창조주의 초월적 능력을 보여준다. 셋, 실존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들은 - 인생의 의미와 목적,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너머의 삶 -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참고 도서>
전광식. 『문명의 황혼과 소망의 그리스도』. CUP. 2005
존 레녹스.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홍병룡(역). 아바서원. 2020
존 레녹스.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홍종락(역). 두란노. 2018
프랜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김기찬(역). 생명의 말씀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