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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m Sep 04. 2022

밤에게 잠시 햇볕을 빌려주세요

조온윤 시인의 <햇볕 쬐기>를 읽고

  0. 활자도 위로의 한 형태가 될 수 있구나.


 우리는 음성으로 나누는 구어적인 위로에 익숙하다. 먼저  문제 상황을 말하면 상대공감과 연민 사이의 무언가를 말해주는 기브  테이크 식의 위로. 그런데 때로는 나의 고민이 특정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적것이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할 때가 있다.  요즘 고민들은 전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하는  없이 꾸욱 삼켜 기도 근처에 쌓아두었다. 자기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럴 때마다 위로를 해주는 것의 어려움보다는 위로를 받는 것의 어려움을  절실히 느껴진다.


 이번에는 문어로 넘어가 보자. 시집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방적인 서술이다. 쌍방의 대화보다는 시인에서 독자로 향하는 단방향의 서술에 가깝다. 독자는 시인이 풀어낸 시를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마음에 담아 간다. 내가 기브 하지 않아도 테이크할 수 있는 것들이 책 속에 잔뜩 모여있는 셈이다. 때문에 내가 시집을 읽을 때는 주로 내 마음이 가난하다고 느낄 때였다. 어쩌면 이번 여름에 시집을 사 시를 읽는 것도 모자라 독립서점에서 진행하는 시 수업까지 들은 것은, 내 마음의 공허가 최고치를 찍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며칠 전에도 약간의 공허감을 느끼고는 아름다운 문장들이라도 수확해보고자  시집을 펼쳤다. 그런데 시집이 건넨 것은 예쁜 활자의 집합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활자가 주는 위로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마음이 햇볕으로 가득 찼다. 너무 따뜻해 스타벅스 한복판에서 사람들 몰래 여러 번 울었다. < 햇볕 쬐기>라는 시의 제목처럼,  시집을 읽는 행위가 햇볕을 쬐는 행위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위로를 나만 느끼는 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다!'.


 그래서 시집을 다 읽자마자 sns 스토리에 책을 올렸다. 스토리 속 짧은 텍스트로는 부족해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쓴다.






1. “허무주의자의 의미 찾기”라는 모순적인 말


 얼마  새벽에 가까운 시간 안방에서 엄마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우리는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졌었지. 순수한 궁금증, 그리고 약간의 우울감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스무 살의 내가 간혹 느끼는 어두운 감정들의 근원에 항상 이 질문이 위치해있는 듯하다. 깊이 생각해보면 나는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삶의 허무함 때문에 슬퍼한다. 그게 관계의 단절이든 목표 달성의 실패든 말이다.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에는 항상 허무하다거나 공허하다는 무채색의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렸을 때는 슬프다는 감정에 파란색을 떠올렸는데 이제는 회색이 떠오르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어쩌면 나는 낭만을 쫓는 허무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허무해하면서도 뭘 그리 찾아 헤매는 건지. 회색에 색깔을 더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다. 'Indica'라고,  이럴 때마다 듣는 노래가 있다. 노래 후반부에 몸짓을 키워가는 기타 소리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무던하게 읊조리는 가사다.


Life, what a waste.

What shall we do?

Shall we smoke and drink

Or just sleep all day?

.

.

.

Life, it's just temporarily nice.

It's just temporarily sad

For an ordinaries like me and you.


 매번 들을 때마다 노래 가사에 많이 공감한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행복하고 일시적으로 슬프다. 하루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무너져서 다시는 일으킬 수 없을 것처럼 굴다가도 그다음 날에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좋아하는 디저트 하나에 너무나도 쉽게 거대한 행복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마치 원형의 운동장을 뺑글뺑글 도는 기분이다. 반은 행복의 ,  반은 슬픔의 것이라  바퀴를 도는 동안 웃으며 울며 달린다. 대개 슬픔과 행복의 반복은 운동장에서의 질주처럼 아주 단순하고도 빠르다. 그런데 가끔은  슬픔의 영역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열심히 달리는데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같고 주변은 여전히 어둡다. 머리로는 언젠간 끝나는 일시적인 슬픔이라는 것을 인지하더라도 마음은 계속 괴롭고  괴로운 거다.


'아직도야! 대체 이번엔 언제 끝나는 거야?'


 과장과 보탬 하나 없이,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이렇게 오랜 시간 이 어두운 영역을 달리다 보면, 다시 행복의 영역에 들어선다 해도 미래에 언젠가 다다를 저 어두운 곳이 또 무서워진다.


 비슷한 얘기를 엄마에게 했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어차피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필연적으로 생길 텐데. 시간에게 떠밀려 주어진 삶이 끝나서야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있을 테고. 그전까지는 끊임없이 일정한 슬픔을 느껴야만 하는 거잖아. 몇 바퀴 돌았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꾸준히 반복하는 이 기계적인 일상들이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엄마는 내가 아직 어려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찬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 말대로 아직 어린 나에게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일시적이고 또 반복적이다. 이 삶의 일시성과 반복성은 가끔 내가 감당하기 힘든 너무나도 어려운 고민, 해결조차 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고민을 안겨준다. 삶의 이유 따위의 것들. 그럴 때마다 끝나지 않을 생각에 빠져 이유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밤을 새운다. 참으로 우울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우울하고 재미없는 짓을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니.


공복 산책

이라는 시였다.

시가 건네는 물음은 내가 얼마 전 엄마에게 건넨 물음과 꼭 닮아있었다.


걸어가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염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 가지 대답을 만나고 싶었지


(...)


이봐,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자 하는 거지?

삶이 아니면 배고픈 일이 없고

삶이 아니면 싸우는 일이 없고

삶이 아니면 슬퍼하는 일 하나 없다

그런데 왜 아직도 대답을 내놓지 않는거지?


(...)


하지만 고작 배곯는게 두려워 떠나진 않겠지

흘리는 눈물만큼 내 몸도 말라갈까 두려워서

떠나진 않겠지

검불처럼 가벼워진 빈속으로 오늘은 많이도 걸었구나


(...)


살아가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이 살아가다

만나게 되는 아주아주 단순한 풍경


내 지친 마음은

거기에 가 쉬어도 충분하겠지



  시집의 1부에는 유난히 이런 시가 많다. 보통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는  슬픔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끝나기 마련인데, (너무 우울한 시를 싫어하는 이유다.)  시는 분명한 전환점이 존재한다. 부정에 대해 이야기하다 덤덤하게 긍정하며 끝나거나, 혹은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소박하고 예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난다. 시집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같다.


 화자가 바라는 대답, 그리고 내가 바라는 대답에 대한 힌트가 시의 후반부에 정확히 언급된다. 삶이 단순히 슬픔과 행복의 반복뿐인  같아 무력감을 느끼는 내가, 삶의 단순함에 대한 태도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꿀  있는 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밤의 시간에 어두운 감정들을 느끼며 '지친 마음' 봤는데 시인은 햇볕의 시간에서 단순한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친 마음의 휴식' 말한다.


 시를 읽고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성찰을 했다. 가끔은 배가 곯는 게 두렵고 몸이 말라갈까 두렵지만(비유적 표현이다. 실제로는 너무 잘 먹고 살이 잘 붙어 문제다.) 그렇다고 삶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가지 않았던 이유는 내 주변을 둘러싼 단순한 풍경 덕이었다. 슬픔이 반드시 존재한다면 행복도 반드시 존재한다. 당장이라도 부르면 달려와줄 친구들이 있고 내 말도 안 되는 고민들을 들어주는 가족도 있다. 좋아하는 영화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지금처럼 좋아하는 시집도 있다. 내 주변에는 여전히 변치 않는 이런 단순한 풍경이 위치해있다.


   없는 위로를 얻었다. 비록 나는 지금 밤의 시간을 살고 있고, 어쩌면 내가 바로 어두운   자체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온도를 낮춰가고 있었다 해도. 나는 결국 시집을 우연히 펼쳤고  시집이 만든 틈만큼의 햇볕을 얻었다. 조온윤 시인이 낮의 시간으로부터 빌려준 볕 덕에 온도가 조금 올라갔다. 명확한 형태의 답을 얻는 것이란 평생 해결해야  숙제와도 같겠지만 그래도 모호한 형태와 모호하지 않은 온도의 무언가를 분명히 얻었다.








2. 모두가 둥글게 살 수는 없나요?


 가만히 보면 내 가장 친한 친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세상의 모습이 주 대화 소재가 되는 것 같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는 스몰 토크 대신 거시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빅 토크가 이루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와 내 친구들은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 같은 것들을 언급하곤 한다. 왜 다들 그렇게 뾰족하게 사는 건지,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건지- 같은 작고도 큰 염원. 동글동글한 내 친구들과 나는 둥근 세상을 꿈꾸는 듯하다.


 정말 둥근 세상은 허상인 걸까? 때로는 (혹은 아주 자주), 둥글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나조차 의식하지 못한 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뱉는다. 이후에는 괴로운 자책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다. 동시에 인간이 혹시 뾰족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라며 성악설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지구는 둥근데도 세상살이는 마냥 둥글지 않은 것 같다. 이 불일치가 사람들에게 지독한 상처를 안겨줄 때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뾰족한 사람들에게 찔리고는 하니까.


 정신적인 찔림은 아주 자주 그리고 쉽게 겪을 수 있다. 지하철에서는 다들 눈살을 찌푸린 채로 서로를 밀어대고 '내릴게요.'라는 말에도 꿈쩍 않고 문 앞을 막고 선 사람들이 많다. 나아가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상대는 가벼운 뒷담화의 대상이 되며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에 지쳐 이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누군가는, 이타적인 마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척할 뿐이라고. 또 누군가는, 이타적인 사람은 언제나 피해자의 위치에 있기 마련이라며 이기적인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낭만을 쫓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해서도 낭만적인 생각만 하고 싶다. 아무도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는 세상. 가끔은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의 모습같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더라도 나는 그런 세상을 바라고 생각과는 다른 현실에 항상 실망하기를 반복한다. 



원주율

이라는 시가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내가 하는 이런 생각이 그대로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원의 둘레를 재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무수한 직선을 잇고 이어서

곡선을 만들었을 수학자에 대해

사실 휘어짐이란 착시일 뿐이라고


뼈의 모양은 직선이지만 서로의 뼈를 비스듬히 잇고

뼈를 또 잇고

이어서

둥그런 원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


한 사람을 위해 팔을 꺾는 사람들과 있었다

우리가 햇빛 속에 함께 있음을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이라 느낄 때


(...)


이제 바늘 자국을 만져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돌고

돌아서

나의 차례였다



 헌혈에 대한 시였다. 헌혈이라는 행위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시의 내용 그리고 낭만적인 세상에 대한 내 염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사람들이 직선처럼 그저 곧고 뾰족한 본성을 가졌다고 해도, 다들 서로를 아주 조금씩 배려하며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원이 된다면 시의 마지막 연처럼, 내가 지불한 배려의 값이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올 테니까.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내가 바라는 둥글고 말랑한 세상을 잠시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이런 이상적인 상상이 그저 낭만과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조온윤 시인의 다정함에 설득당할 테다. 나처럼 시의 언어가 주는 상상력을 통해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을 떠올릴 수도. 


 '단체관람'이라는 시에서는 가로로 긴 의자에 대해 말한다. 서로 옆을 나눠준다면 쓸쓸한 뒷모습, 컴컴한 배후 없이 의자 끝에서 끝으로 전달되는 쪽지를 함께 볼 수 있지 않겠냐며. 시를 읽고 70억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아주 긴 의자를 상상해보았다. 결국엔 원 모양으로 끝과 끝이 만나는 아주 긴 의자를. 시에서 바라는 낭만적인 세상의 모습에 내 낭만적인 상상을 더해보며.


 '무족영원'이라는 시에서도 도마뱀이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다. '넘어진 이들에게 다가가 내밀어볼 수 있는 손이 없다면 영원 따위는 주머니에 넣어두고 꺼내보지 않는 슬픔일 것 같다'라는 말. 이렇게 손을 내미는 배려의 행위가 바로 시인이 말하는,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둥글다'의 정의인 것 같다. 우리 모두 완전히 둥글게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이기적인 종이라 해도 직선이 또 다른 직선의 손을 잡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다들 곡선을 꿈꾸는 직선의 삶을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3. 혼자인 줄 알았는데요



묵시


(...)

사교적인 사람들과 식사 자리에 둘러앉아

뙤약볕같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침묵의 몫입니다

혼자가 되어야 외롭지 않은 혼자가 있습니다

(...)

침묵을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묵시라는 시를 읽고 가장 많이 공감했다. 동시에 조온윤 시인의 엠비티아이 앞자리를 i라고 감히 추측해봤다. 사람들과 둘러앉을 때 외로움을 견뎌야만 하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는 말. 이 말은 나와 같은 수많은 i 인간들의 공감을 샀으리라.


 간혹 술자리나 대형 모임에 나갔을 때 침묵만 지키다 올 때가 있다. 사회적 에너지를 남들보다 더 빨리 소진하는 탓이다. 그럴 때마다 에너지가 끊이지 않는 주위 사람들이 신기하고 동시에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침묵은 현대 사회에서 부정적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 또한 침묵이 견뎌야 할 몫이다. 일명 광대라고 불리는 역할이 술자리의 필수요건이 되었듯 폭소와 박장대소 같은 데시벨 높은 것들이 환대를 받으니, 침묵은 저 구석자리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침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일, 간혹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일은 나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말고도 침묵을 사랑해 떠다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혼자가 되어야 외롭지 않은 혼자는 그야말로 나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집은 혼자들에 대해 말한다.





중심잡기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


그런데

새벽에 비가 왔었나요?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나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오랜 동면 끝에 지구로 돌아온

우주비행사처럼 묻는다


(...)


가끔씩

나는 나의 고도가 헷갈리고


사람들도 몰래

사람들의 발이

젖어 있곤 했다



 날개가 꺾인 슬픈 천사, 혹은 추락해버린 우주비행사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축축한 곳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쳐버린. 하지만 화자의 추락은 비극적이지 않다. 추운 겨울인데도 겨드랑이가 따뜻하다. 부축을 해주는 사람들 덕이다. 나아가 발이 축축한 것은 천사뿐이 아니다. 화자를 둘러싼 모두의 발이 젖어있다.



 우리는 간혹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라 착각한다. 고도가 헷갈리는 것은 나뿐이고 확신 없이 나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 또한 나만 느끼는 거라고. 특히 늦은 밤 혼자 침대에 누워있을 때는 그 감정이 배가 된다. 지금의 내가 온전히 혼자라는 감각이 너무나도 축축이 다가온다. 이런 나에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아주 힘이 강하다. 시를 읽고 있는 독자에게 당신은 지금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라고 알려주며 이상한 연대감을 준다. 독자를 부축하는 동시에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단수인 나에 집중했는데 눈을 떠 주변을 보면 사람들이 있고 시집의 1부를 다 읽어갈 때 즈음 그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가 되어있다. 이처럼 혼자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1인칭 단수였던 내가 1인칭 복수가 될 수 있게 하는 힘. 이게 바로 조온윤 시인의 시가 가진 힘이자 나를 스타벅스 한복판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울게 한 힘인 것 같다. 






4.


 이렇게까지 길게 쓸 작정은 아니었는데. 시가 준 생각들이 너무 거대하고 다채로워 무작정 와르르 풀어보았다. 어두운 밤의 시간을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이 시집을 필독도서처럼 읽었으면 해요. 내가 받은 이 햇볕을 다른 분들도 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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