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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Dec 05. 2022

관계는 끝나는 게 아니다

2017.3. 계간<니>46호, '관계의 책임'

올해 40살이 됐다. 30대를 마무리하고 40대를 시작하는 시기라 그런지 지금까지 인생을 10년 단위로 끊어보게 된다. 20대에는 학교 다니고 졸업해 백수로 있다가 취업해서는 남편을 만났구나, 30대는 남편과 결혼해 아이 낳고 살았구나로 정리되는 20년이 좀 초라하게 느껴졌달까. 그동안 난 뭘 했고 뭐가 남았지 하는 생각에 빠지다가 내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됐다. 



20년 넘게 만나온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예전만큼 자주 만나거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해 아쉽고, 그나마 연락도 하지 않는 친구들은 더 많다. 원래 친구가 많지 않은 나이기에 멀어진 친구들이 더 생각난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떠난 친구도 있고 있는 곳이 멀어지니 만나기 어려워지고 연락이 뜸해진 친구도 있다. 그리고 만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연락이 잘 안 돼 궁금한 친구도 있다. 세월이 흘렀고 나도 친구도 달라졌고 상황도 변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뭔가를 덜해서 그렇게 됐다는 생각에 내 문제다 싶기도 하고 뭔가 아쉬운 기분도 많이 든다. 


20대 중반에 헤어진 친구는 대학 졸업하고 취업이든 뭐든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데에 실망해서 나와 절교 선언을 했다. 친구에게 절교를 당한 건 처음이고(내가 다른 친구를 피한 적은 있지만…) 나 자신도 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내 상황도, 나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구나 싶어 충격이 컸다. 앞으로 뭘 하고 살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는 한심한 내가 친구에게도 버림받았구나 하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그 친구와 만나지 않고 나서 더 친하게 지낸 친구는 결혼 후에도 잘 만났는데 아이를 낳고서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결혼 안 한 친구에게 남편에게 속상한 점, 아이 키우며 답답한 얘기를 많이 해서 그랬을까. 그 친구의 얘기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 내가 사로잡혀 있던 남편, 육아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때가 더 많았던 거 같다. 아이와 외출할 수 있을 때쯤에는 아이를 데리고 만난 적이 있는데 아이가 너무 예민하다는 둥 아이와 함께 만나는 걸 불편해하는 것 같아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후로는 가끔 만나 점심을 먹었다. 친구는 연애하면서 생긴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난 거기에 집중하기보다 ‘넌 그래도 아직 결혼 안 해서 그런 고민도 하고 좋겠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얼른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하던 때라 내가 불만으로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들릴까 싶어 말을 덜 하게 됐다. 그러다 친구가 지방에 있게 되면서 연락이 뜸해졌고 작년에는 생일 때에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큰아이 키우면서 더 자주 만난 친구도 있었다. 결혼도 비슷한 때 하고 아기도 3주 차이로 낳아서 육아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남편들도 서로 아니 남편 얘기하기도 좋았다. 아이랑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그렇게 하루가 가는 게 싫은 날은 늦은 오후더라도 그 친구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왔다. 지하철로 1시간 거리인데 오고 가는 길도 집에만 있던 나에게는 짧은 여행길이었다. 남편들은 거의 저녁을 먹고 들어왔기에 같이 저녁 먹고 꼬물거리는 아기들은 같이 놀고 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집을 리모델링하게 되고 일을 시작하면서 집에는 한 번 가보고 연락도 뜸해지게 됐다. 바빠졌는데 연락하기가 좀 미안해졌다고나 할까. 카톡을 하거나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기도 해서 친구 차단된 게 아닐까 생각만 하고 있다. 




세 친구 모두와 마무리가 조금, 아니 많이 찜찜하다. 20대 초반 때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아진 엄마가 집을 나갔다. 아빠와의 사이만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실망이 많이 쌓여 있던 상태긴 했다. 엄마는 마루에 누워서 자고 있던 나에게 “잘 있으라”고만 하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 후 계속 드는 생각은 ‘그렇게 깔끔하던 엄마가 뒷마무리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하는 거였다. 이혼을 하고 깔끔하게 떠나면 안 됐나? 엄마가 들어왔는지, 연락되는지 묻는 친척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게 뭔가 싶었다. 그냥 선언하고 나갔음 얼마나 좋으냐고.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딸이 돼서 엄마를 걱정하거나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귀찮아했다는 핀잔을 들을 게 뻔하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혼하거나 아이들을 떠날 날이 오면 잘 설명하고 가야지,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해야지 하는 다짐을 했었다. 


나한테 절교 선언을 한 친구는 나중에, 며칠 아니 몇 달 후였나 전화를 했었다. 난 끝내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한심하게 보는 친구는 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 친구는 나를 아끼고 걱정하던 친구였다. 그 친구의 기대에 내가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엄마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처럼 친구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다시 연락하고 만나도 뭐?’ 내 머릿속에서는 그 친구는 나한테 계속 실망하고 더 이상 실망할 수 없어 그만 보자고 할 거 같았다. 그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앞길을 잘 닦아 나가는 친구였기에 사실 내가 더 초라해지기도 했다. 그런 부분 말고 그 친구의 다른 부분은 내가 채워주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난 필요 없는 친구인가 보다 싶어 나도 그 친구를 차단했다. 이런 말을 직접 하고 “그러니까 난 더 이상 너를 만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게 깔끔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할 상태도 못 됐다. 


두 번째 친구는 내가 알트루사에 다닌 후 “너 얘기 듣는 게 달라졌다”며 나도 모르는 내 변화를 알아차린 친구다. 그런 친구에게 난 내 마음을 얘기하지 않고 숨겼다. 그 친구의 얘기는 잘 들릴 때도 있었지만 듣는 척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걸 다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친구의 어떤 면에 꽁해 있으면서도 그걸 말하진 못했다. 말하면 그건 내가 오해한 거란 얘기를 들을까 봐? 아님 내가 본 그게 맞을까 봐? 못 하는 말, 숨기는 말이 생기면 더 부자연스러워지고 만다. 세 번째 친구에게는 내가 삐져 있는 상태이다. 3년 사이에 나도 둘째를 낳고 친구도 둘째를 낳았다고 들었는데 나한테 연락도 안 해? 나랑 연락 안 해도 다른 친구들이랑 잘 지내니 그러겠지 싶어서 말이다. 궁금하고 연락하고 싶을 때 더 적극으로 해볼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뭘까. 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까 봐 확인사살당할까 봐 피하는 거다. 


관계에는 서로 책임이 있는 거란다. 친구 사이에도. 나 역시 친구들에게 일방으로 버림받은 게 아니다. 관계에 있어 수동적 태도로 있는 건 무책임하다. 못나고 모자란 나를 숨기고도 싶고 그 자체로 이해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에 난 친구들에게 성의를 갖고 나를 표현하지 않았다(못했다). 또 그 친구의 마음을 성심껏 알려고 하지도 않은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엄마에게 바라던 일방적 선언은 깔끔한 마무리도 못 된다. 그동안 관계 맺어온 사람에게 무책임한 거다. 친구 사이에, 어떤 관계든 끝마무리가 더 중요하겠나, 관계 맺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 끝을 잘 맺으려면 그 과정에서 소통이, 마음 주고받음이 잘 됐어야 되는 건데 그러면 굳이 끝을 맺을 것도 없겠지 싶다. 서로가 관계에 대해 책임을 다하면 관계는 끝나는 게 아니다.       



정은선 알트루사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부터 나만 보다가 주변 사람, 이웃,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편과 8살 세훈이, 2살 세진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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