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 계간<니>51호, '내게 중요한 것, 진짜 중요한 건가?'
겉과 속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 『The Ages of Man』 중 <Childhood>, 쏜튼 와일더
고아가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나? 부모님이 죽어 없어지는 상상. 그러면 나는, 우리 형제는 어떻게 살게 될까? 이렇게 상상하며 놀이를 해본 적이 있나? 그럼 내 아이들이 이런 놀이를 한다면 어떨까?
쏜튼 와일더가 쓴 단막극 <Childhood>에는 고아놀이를 하는 삼남매가 나온다. 고아놀이는 장례식놀이에 이어 버스 타고 멀리 떠나는 놀이까지 이어지는 내용이다. 12살인 맏딸 캐롤라인, 10살 도디 그리고 8살 막내
빌리는 엄마, 아빠와 교외에 뜰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셋은 평소에 장례식놀이, 호텔놀이, 중국가기놀이 등을 한다. 금요일, 아빠가 퇴근해 돌아올 무렵 아이들은 아빠가 늦게 올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을 하고 놀지 궁리하는데 아빠는 예상보다 일찍 집에 왔다. 한 주간 회사생활을 마친 아빠는 집에 와서 자식들이 반갑게 맞아주길 요구하지만 모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아이들이 놀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다 모일 거라고 했다.
엄마아빠는 아이들이 요즘 하는 놀이에 신경 쓰인다. 부모가 죽어 장례식을 치르고 고아가 되는 놀이라니. 도통 아이들 속마음을 모르겠다. 아빠는 꿈속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아이들의 생각,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간절히 외친다. 그 소원이 이뤄졌는지 엄마아빠는 아이들의 놀이에 타인으로 참여하는 꿈을 꾼다. 부모는 차사고로 끔찍하게 죽었고 삼남매는 조문객을 맞는 상황이다. 엄마는 검은 옷을 갖춰 입고 조문객으로 와서 주로 맏딸 캐롤라인과 예의를 갖춘 대화를 나눈다. 삼남매는 장례식을 마치고 다른 친척들이 오기 전에 도망을 나와 어른의 보호를 받지 않고 먼 곳에 가서 다른 이름으로 살 계획을 짰다. 그래서 멀리 여행할 수 있는 버스를 탔다. 이 놀이에서 아빠는 운전기사, 엄마는 승객으로 함께한다.
놀이 속에서 삼남매는 어른들과 거리를 둔다. 격식을 갖추지만 의지하거나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엄마아빠가 없는 고아가 되어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게 된 걸 즐기는 듯하다. 어떻게 먹고살지, 어디서 잘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다. 실제와는 다른 ‘놀이’일 뿐이니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빼도 된다. 엄마아빠도 일상에서와는 다르게 반응한다. 타인으로 참여하며 어른이지만 아이들에게 섣불리 의견을 제시하지도, 제지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의 생각을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면 아이들도 예의를 갖춰 말한다. 사실 동생들은 자기들이 본 부모의 모습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첫째가 동생들의 말을 막으며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좋은 사람이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한다. 부모가 죽었으니 나쁘게 말할 것도 없는 셈이다. 아이들 눈에 그들은 그저 쇼핑과 골프에 빠져있고 다른 흥미로운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어른이었을 뿐이다. 어린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들 부모만의 잘못은 아니다. 다른 어른들도 마찬가지니까.
멀리 떠나려던 버스여행에 실패하고 삼남매가 집 앞 모퉁이에서 내려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서 연극은 끝난다. 그런데 연극에서 나오지 않은, 이 놀이 이후가 궁금하다. 엄마아빠는 아이들의 놀이에 들어가 궁금하던 아이들의 마음을 봤다.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바뀔까?
내가 엄마와 함께 살던 시절 말다툼을 할 때 엄마의 노고를 무시하는 말을 하면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라는 핀잔을 들었다. 내 아이들이 이런 놀이를 한다면 나는 어떻게 말할까? 고얀 놈들이라며 자식 키워도 소용없다, 너희들 나가서 맘대로 살라고 집에서 내쫓는 시늉이라도 하려나. 연극에서 아이들은 엄마아빠와 떨어져 자기들끼리 놀이를 하지만 부모는 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엄마아빠가 죽는 상상을 하느냐, 어른의 보호 없이 살려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 꾸짖거나 죄책감 들게 하진 않는다. 특히 권위주의적이고 마초 같던 아빠가 아이들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모습이 의외였다.
나의 큰아이가 언제부턴가 죽음과 관련된 표현을 한다. 죽는 게 뭐냐고 묻던 어린아이가 사람들은 왜 자살을 할까 의문을 갖는 어린이로 자랐다. 그런데 막냇동생이 태어나기 얼마 전 동생들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구체적으로 본인이 상상하는 죽음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동생, 게다가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혼을 내야 하나 생각했다. 그래도 혼은 내지 않고 동생들이 죽으면 엄마가 속상할 거라고 했다. 그리곤 계속 아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고민했다.
큰아이는 한동안 동생이 태어나면 좋겠다고 했지만 막상 동생이 생기고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나는 “네가 원하던 동생이 생기니 좋지? 동생 예쁘지?”라고 일방적으로 느낌을 정해주었을 뿐 동생이 생겨 속상한 마음은 들어보지 않았다. 게다가 또 다른 동생이 생겨 기쁠 수도 있지만 엄마아빠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테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엄마랑 세훈이랑만 지냈으면 좋겠어? 울 애기” 하니 배시시 웃었다. 요즘도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 동생이 귀찮다고 생각하면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도 하고 엄마가 속상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떤 마음을 표현하려는지 자세히 보려고 한다.
사실 아이들이 겉으로 내놓는 행동과 말을 문제 삼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혼낸 적이 많다. 왜 그러는지 궁금한 마음보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저 착한 아이 같은 행동과 말만 했으면 바라기 때문이다. 나도 연극 속 부모들처럼 어린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가 많기에 읽으면서 뜨끔할 때가 많았다. 함께 있는 시간을 버거워하고 같이 놀자고 해도 피곤하다며 피하고 그저 간신히 밥 주고 옷 입히는 역할만 하는 엄마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서 화와 짜증은 많이 내고 그러다가 미안해도 하지만 나 역시 아이들이 아플 때 제일 사랑하는 것 같다. 정말 달라지고 싶은 마음으로 알트루사의 ‘아이들과 잘 살아보려는 모임(아잘사)’에 나간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고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돌보는 어른이 되고 싶다.
<우리 읍내>라는 희곡으로 유명한 쏜튼 와일더의 이 희곡은 문은희 선생님이 아잘사 모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고 추천해주셔서 읽게 됐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에 영어 원본으로 읽었다. 먼저 번역을 하려다가 서평부터 쓰게 됐다. 어른들과도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어린이들과 이 희곡을 읽으면 반응이 대단할 것 같다. 엄청난 폭로전이 펼쳐지고 아이들의 느낌과 생각이 쏟아지겠지.
♥ 정은선 _ 알트루사에 처음 왔을 때는 한 아이의 엄마였는데 이제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알트루사에서
자원활동하며 생생하지 않던 마음과 꿈을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