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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Mar 20. 2023

죽기 전에 사랑할 수만 있다면

2018.12. 계간 <니>53호, '걱정을 달고 살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걱정이 앞서서 첫 줄을 쓰기도 힘들다. 그래도 시작부분을 멋있게 쓰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일단 써내려가기로 한다. 고민한 만큼 줄줄 풀리길 기대했지만 머릿속에서 쭉쭉 이어지던 멋진 표현들이 글로는 떠듬떠듬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러다가 원래 쓰려던 의미를 살릴 수 있을지 다 쓰기도 전에 걱정이 든다. 글 쓰는 중간중간 다시 책을 열어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이 발견되어서 내가 제대로 파악한 게 맞나, 내 멋대로 읽은 건 아닌가 불안해진다.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도 있고 설사 작가가 묘사해 놓은 부분을 내가 놓쳤다 하더라도 이 서평과 책을 본 사람들과 나중에 이야깃거리가 생길 것이라고 다독여본다.



글이 잘 진척되어 기분이 좋다가도 내가 이렇게 내용을 죄다 쓰면 나중에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영화평을 쓰다 보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듯이 특히 소설에 대한 글을 쓸 때 이런 걱정이 더 많다. 그러면서 이 책을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게 써야 한다는 강박도 생긴다. 그렇지만 이 글은 단순히 신간을 소개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정신건강 계간지 『니』의 ‘정신건강을 읽어요’에 실리는 글이란 점이 퍼뜩 생각난다. 과연 내가 정신건강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현재 나의 수준이란 게 다 드러나겠구나 염두에 두며 미리 부끄러워할 준비도 한다. 하지만 내가 『니』에 실린 글을 읽을 때 글쓴이의 수준을 짐작하는 게 아니라 ‘아! 이런 사람이구나!’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난다.


알트루사 모람의 추천글을 보고 책의 내용에 마음이 끌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호 주제인 ‘걱정’에 맞춰 소설 속 사람들이 무슨 걱정을 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생각, 행동이 다 걱정으로 읽히는데 책에서는 걱정이란 단어를 찾기 힘들었다. 그 사람의 생각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을 뿐 그걸 걱정이라고는 규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생각을 그저 걱정이라고 분류해 버리는데 그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야겠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행동하되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무리일까? 책을 한글 파일로 만들어 ‘걱정’이란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피어오른다. 하지만 독자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걱정은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페루에서 유명한 다리가 갑자기 무너졌다. 요즘같이 강철을 사용한 다리가 아니라 고리버들을 엮어 만들어 사람만 건너던 다리였다. 이 사고로 다섯 사람이 죽었다. 노부인과 소녀, 젊은이, 아저씨와 아이. 이들은 같은 시각 그 다리 위에 있었다는 점 말고는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 순간 다리 근처에 있다가 다리와 함께 개미 5마리(처럼 보이는 사망자들)가 떨어지는 걸 목격한 수사가 이들이 죽은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한다. 방금 전에 그 다리를 건넌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들이 죽게 된 이유에 신의 의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그 수사가 조사한 것 이상을 보여준다. 죽은 다섯 사람은 세 명의 여인들과 관계가 있었다. 몬테마요르 후작부인, 카밀라 그리고 마리아 수녀원장이다. 이 세 사람은 서로 관계가 밀접하지는 않다. 후작부인과 함께 떨어진 시녀는 마리아 수녀원장이 후계자로 점찍어 놓은 아이였다. 젊은이 역시 수녀한테서 자랐다. 피오 아저씨는 카밀라를 배우로 키워준 인물이고 아이는 카밀라의 아들이다.


후작부인은 자신의 출신성분과 외모에 자격지심이 있다. 결혼 후 아주 예쁜 딸을 낳자 그 딸에 걸맞지 않은 엄마라는 생각에 딸의 사랑에 집착한다. 딸이 멀리 스페인으로 시집을 가버리자 자기 생활은 돌보지 않고 딸에게 편지 쓰는 데만 열중했다. 페루에서 유명한 이야기는 다 알아다가 미사여구를 동원해 쓴 편지는 후대에 엄청 유명해져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을 정도이다. 사위는 그 편지에 감동의 표현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딸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카밀라 혹은 페리콜이라 불리는 여인은 페루의 대표 여배우로 뛰어난 미모와 연기로 유명했다. 총독의 정부로 아이 셋을 낳기도 했다. 그중 아들에게 장애가 있었다. 연극을 그만두고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천연두에 걸린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생긴 후에는 사회적 교류를 모두 끊고 칩거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자신은 멋진 외모로 사랑을 받아왔기에 아름다움을 잃은 후에는 사랑받지 못하리라고 여긴다.


수녀원장은 한평생을 고아들과 아픈 자들을 돌보며 살아왔다. 그들을 돌보기 위한 고민도, 좋은 궁리도 많고 계획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누가 이해해주며 계속해서 해나갈지 걱정이다. 그런 가운데 심지가 굳고 성실한 고아소녀 한 명을 후계자로 점찍어 놨다. 그리고 훈련의 일환으로 후작부인 집에 시녀로 들였다. 그리고는 몰래 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지켜본다. 




산 루이스 레이 다리가 무너지면서 후작부인은 죽고 카밀라는 피오 아저씨와 아들을, 수녀원장은 후계자 소녀와 키워준 청년을 잃는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후작부인의 딸과 카밀라 그리고 수녀가 수도원에서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를 찾게 되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이 세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다가 새롭게 알게 됐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후작부인은 죽기 얼마 전까지 딸에게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 사랑은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딸로부터 좋은 엄마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이랄까. 그러다 딸의 임신소식을 알게 되고 출산 준비를 하러 다니다가 딸에 대한 사랑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진짜 사랑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사고 전에 부친 마지막 편지는 딸에게 닿았고 딸이 수녀원장을 찾게 된 이유기도 하다. 카밀라는 사랑을 받기만 했지 사랑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피오 아저씨와 아들이 죽은 후 사랑이, 상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절규했다. 그러다 자신처럼 두 사람을 잃은 수녀원장을 찾아온다. 수녀원장은 인류애는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죽게 된 소녀도 도구로 여긴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밀라와 후작부인 딸을 만나고 나서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랑을 하고 싶은 모든 충동은 그런 충동을 만들어낸 사랑에게 돌아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


후작부인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지만 곧바로 사고로 죽었으니 허망하다고 말해야 할까? 새 출발을 앞두고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될 거 같은 희망이 있던 에스테반, 피오 아저씨 그리고 하이메도? 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해야 하나? 그리고 결국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제대로 사는 게 의미 없는 걸까? 죽음 직전에라도 변화는 의미가 있다. 특히 사랑을 하게 된다는 건! 과연 나는 죽기 전에 그런 변화를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게 어디 걱정만 한다고 이루어지겠는가. 



♥ 정은선 _ 알트루사에 처음 왔을 때는 한 아이의 엄마였는데 이제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알트루사에서 

자원활동하며 생생하지 않던 마음과 꿈을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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