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때문에 우울감이 극에 달하던 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없는 용기를 내서 다음 카페 댄스동호회에 가입했다. 한 달을 망설인 끝에 간 곳은 댄스학원이 아닌 한쪽에 바가 있고 반대편에 댄스홀 있었다. 살사클럽은 낯설었다. 가볍게 몸 푸는 동작을 따라 했다. 춤을 한 동작씩 배우고 연습하며 음악에 맞춰 1시간 동안 1곡을 배우는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아서 내 몸을 원망하게 된다.
혼자 집에서 외국 TV 쏠 트레인이나 M뮤비를 보고 배웠기 때문에 기본기가 없어서 이상한 버릇이 생겨버렸다. 정박이 아닌 엇박자로 추고 오른쪽은 되지만 왼쪽은 잘 안 됐다. 그냥 춤을 즐길 뿐이지 잘 추지는 못하고 혼자만의 춤 세계에 빠진다.
어느 날 노랑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짧은 노랑머리 밑으로 스포츠 머리띠가 보인다. 양쪽 귀에 귀걸이가 가득하고 목걸이까지 ‘헉’ 겁이 났다. 요란한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옆으로 체인이 두 줄이 걸려있다. 어깨에는 인라인을 메고 손가락에 반지가 한두 개가 아니다.
‘뭐지, 저 사람과 엮이지 말아야지’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너무 인상적이라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최대한 티 안 나게 노랑머리를 피해 다녔다. 노랑머리는 강사들과 같이 댄스동호회 카페운영진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가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시절 나는 대인공포증이 약간 있었다. 게다가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불편해했다. 강사님은 회원을 관리하는 것뿐인데 그 친절이 부담스러워 배움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 노랑머리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회수되니 춤의 열망이 커져 주말만을 기다리게 됐다.
음악에 취하면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어서 쾌감을 느꼈다. 수업 후 뒤풀이 자리에서 모두 친해졌다.
동갑 강사님 덕분에 수월하게 사람들과 잘 지내게 됐다. 점점 실력도 늘어나며 칭찬도 받았다.
강습실이 강남 살사클럽에서 신촌 에어로빅학원으로 바뀌고 적응할 무렵 노랑머리가 나타났다. 머리카락 색이 블랙으로 바뀐 채 얌전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 가끔 강습실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고 나에게 조금씩 아는 척을 했다. 우리는 회원들과 정모, 생일파티, 클럽 데이나 번개로 만남이 잦아지며 불편함이 익숙함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언제나 모였다 하면 1차는 든든히 먹고 2차로 꼭 클럽에 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짐을 맡긴다. 자리를 잡아 음료수를 놓고 스피커로 향한다. 음악 소리가 커야 몸이 더 리듬에 반응하기에 그쪽으로 향한다. 음악을 따라가면쑥스러움은 사라지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춤을 즐기게 된다.
회원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춤에 취해 있을 때쯤 시선이 느껴진다. 노랑머리가 어느 순간 옆에 와서 쪼그리고 앉아 나를 구경한다.
‘미치겠다 왜 저러지?’ 그는 무슨 취미인지 사람을 참 불편하게 한다. 나는 도망 다니고 그는 날 쫓아다녔다. 나중에 날 왜 구경했냐고 물어보니 그냥 궁금하고 신기했다고...
생각보다 말은 잘 통했다. ‘뭐지? 이상하게 뭐지? 계속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단둘이 만나 시사회를 보고 밥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신기하게 말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그와 사귀는 것을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번개로 클럽에서 땀나게 놀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벤치에 나, 남편, 강사카이 셋이 나란히 앉아 발장난을 하고 있었다.
강사 카이가 우리 쪽을 보며 남편에게 물었다.
“형, 연화랑 사귀어?”
남편이 카이를 보며 말했다.
“나 연화랑 사귀지”
나는 너무 놀라서 남편을 쳐다보며
“내가 힙합 형이랑 사귀어요?”
남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뭐, 나랑 사귀는 거 아니야? 단둘이 영화 보고 차 마시고 밥까지 먹었잖아, 그럼 사귀는 거지? 너 뭐냐?”
그날부터 우리는 동호회 공식 커플이 되었다. 나는‘뭐지?’ 이렇게 사귀기도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 내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는 내가 나일 수 있게 편안함을 주었다. 우리는 다른 점 빼고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냥 물 흐르듯 그렇게 커플이 돼버렸다.
나는 그때 싸이월드 영화동호회 운영진이라 시사회 표가 많이 생겨서 주변에 표를 많이 뿌렸다. 가끔 같이 볼 사람이 없을 때는 친한 순으로 전화를 돌렸다. 매번 그가 시간이 맞아서 영화를 본 건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너무나 다른 성향의 그와 나는 춤이란 공통점으로 만났다. 하지만 식성, 영화 취향, 시간개념,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서 많이 참아야 했고 노력해야만 했다.
집 밖을 나오는 순간부터는 약간의 긴장 상태로 생활한다. 나이를 먹어도 고칠 수 없다. 누군가 그랬다. 너는 가면이 몇 개냐고, 할 말이 없었다. 집 밖은 내겐 너무 힘든 세계다. 그래서 집에만 가면 에너지는 고갈되고 나는 녹초가 된다. 안 그러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된다.
한 번은 노랑머리가 인라인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솔직히 배우고 싶지 않았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게 무서웠다. 싫었지만 내게 베푸는 친절을 거부할 수 없다. 내가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다. 남이 나 때문에 불편한 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힘들다. 그래서 내가 불편한 걸 참는 게 당연시 됐다.
우리는 고깃집에서 5인분을 먹으면 그가 5분에 4.5를 먹고 나머지 0.5를 내가 먹는다. 대식가와 소식가, 동적인 사람과 정적인 사람 스킨십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우리는 극과 극이다. 둘 다 술을 못 마시고 영화, 춤, 만화를 좋아해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다른 점이 많아 놀랐다.
데이트할 때 종각역에서 만나 인사동 단골 한식집 칠갑산에 들러 저녁을 먹고 종각역 만화방에서 한두 시간 만화책을 보고 맥주창고에 간다. 맥주를 마시며 춤을 즐길 수 있는 장소다. 우리는 늘 무알콜 맥주나 칵테일, 노가리 또는 쥐포를 시키고 고정 자리에 앉는다. 수다를 떨거나 같이 춤을 춘다. 이상하게 어색하지가 않다 이렇게 자연스럽다니 내가 놀라울 따름이다.
남들이 보는 겉모습과 달리 나는 고지식하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며 조금씩 달라졌다.
그동안은 옷으로만 풀던 내 자아를 춤으로 풀게 됐다. 뭔가를 발산하고 싶은 나는 춤을 추고 싶었지만,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꾹 참고 살다가 우울감이 극에 다다랐다. 약간 미쳐서 댄스동호회에 가입한 거였다.
패션으로 풀던 스트레스는 그를 만나며 춤으로 승화시켰다. 춤출 때만은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나를 느낄 수 있다. 음악에 몸을 표현하다 보면 모든 감각이 살아나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 덕분에 춤출 때만큼은 남들 눈을 신경 안 쓰게 됐다.
클럽에서 다른 여자들이 그를 춤으로 유혹하면 그는 실실 웃으며 좋아했다. 그럼 나도 모르게 다른 남자를 춤으로 유혹하고 내가 아닌 내가 된다. ‘미쳤나 봐’ 순간 후회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그러다 정말 미친 짓을 하고 말았다. 강남 MB클럽에서한 달에 한 번씩 댄스 대회를 여는데 그가 바람을 넣어서 나가버렸다. 1차전은 남녀 구분해서 무작위 음악으로 춤을 추고 호응이 좋은 남녀 4명이 결승에 오른다. 남녀 짝을 정하고 음악을 틀면 남녀가 한조로 춤을 추고 4명의 호응도를 보고 1, 2위를 정해 상금을 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4위로 떨어지고 창피함만 남았다. 한동안 그는 두고두고 날 놀려먹었다.
그에, 바람잡이에 또 일을 쳤다. 정선희 정오의 희망곡 라디오에 그와의 연애 사연을 보내서 당첨됐고 선물로 스팀 청소기를 받았다. 결국, 그 스팀 청소기는 결혼 선물이 되고 그와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은 나를 뭐든지 잘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줄 알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무진장 노력하거나 어느 순간 세뇌돼서 몸이 움직인다. 만능이 아니지만 만능이 되고 만다. 그 덕분에 하고 싶은 걸 성공하기도 하고 할 수 없는 걸 알아 가며 진짜 나를 지금도 찾아가고 있다.
남편이 해주는 터무니없는 격려와 직설적인 말에 일어난 반발심이 가끔 내 자아를 뚫고 가게 해준다. 나 또한 선택의 절벽에서 그가 등 떠밀어 주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내게 힘이 되어주는 남편에게 고맙다. 이런 게 하늘이 준 인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