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서귀포시에 가면 돈내코라는 신비의 생태숲이 있는데, 이 돈내코유원지 근처에 '제주한란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제주한란이 나고 자라는 자생지가 이곳 돈내코 생태숲이기 때문입니다.
제주한란은 제주지역에만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멸종위기에 처해 있어 1967년 7월 11일에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국내 자생식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종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란의 서식지인 돈내코 계곡 일대도 천연기념물(제43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즉, 종과 자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는 국내 유일의 식물이 제주한란인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한란의 중요성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란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다지 많은 곳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일본 남부, 중국 남부 그리고 대만에만 분포하고 있습니다.
저위도 지역인 중국과 대만에서는 북부지역인 묘율, 온주, 그리고 본건성에 자생하는데 이들 지역은 위도가 낮은 대신에 고도가 높은 산악지대에 자생합니다. 일본의 자생지는 대마도를 비롯하여 규수, 시코구 등 북위 34도선 이남지역으로서 주로 태평양 연안의 온난한 지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제주도의 자생지와 위도가 비슷하거나 낮은 지역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완도나 고흥반도보다 위도가 높지만 쓰시마난류의 영향으로 기온이 온난하기 때문에 한란이 분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 권역에 속하는 기후대가 형성되어 한란이 나고 자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란이 나고 자라는 곳이 전부 동양권이네요. 그래서 그런가 식물학을 벗어나 인문학적으로 '난'하면 떠오르는 것이 유교권의 문인들이 떠오르고 동양화의 주요 소재로 난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많은 않은 것 같습니다.
좌측은 한란전시관 건물이고 우측은 전시관 주차장마당입니다. 저 멀리 한라산 정상이 보입니다.
한란의 이름은 '꽃이 추위 속에서 핀다해서 한란寒蘭'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를 둘러볼까요
한란의 서식지인 돈내코 생태환경을 소개하고 관련 전시물이 전시된 상설전시실
좌측은 온실이고 우측은 전시관 뒤편으로 산책로가 조성된 돈내코유원지인데, 일부구간은 비공개 구간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란전시관을 둘러보시면 제주한란에 대한 각종 정보, 돈내코 생태숲에 대한 소개를 자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 이곳을 둘러보면서 중고등학교 때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때 A4 종이에 파스텔톤으로 배경그림과 함께 좋은 시와 문구가 적힌 코팅지를 많이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대표적인 게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였던 것 같고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란 글도 떠오릅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향기로운 사귐. 벗 사이의 높고 맑은 사귐을 이르는 말.로 지칭되는데... 식물인 난초전시관을 관람하면서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난은 식물학적 그 이상의 의미가 예전 우리 선조들에게도 있었고, 지금의 우리 세대에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 나온 김에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함께 느껴보시죠.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 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했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 두 곳, 한 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도 두고두고 되새길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을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 지면,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 도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