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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형 May 03. 2023

대한민국은 간호사들에게 빚을 진 게 있다, 파독전시관

지난달 가족과 함께 남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푸른 바다로 포위된 남해는 푸르른 바다만큼이나 햇살 역시 푸르름이 가득했습니다.

4월의 따스한 바닷바람과 푸르른 햇살은 6시간이나 차를 타고 간 피로가 스르르 녹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 네 식구는 다랭이마을과 독일마을을 둘러봤습니다. 그리고 독일마을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파독전시관을 관람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남해 독일마을은 1960년대 독일로 취업을 위해 떠났던 한국의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자리 잡은 마을입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가난한 국가였습니다. 국민소득이 연간 76달러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3만 달러를 넘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1970년대 대한민국은 먹고살기 위해 국가는 수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출하고자 노력했고, 국민들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고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 불법을 빼고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던 때였습니다.


국가는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핏값까지... 달러를 벌어 들일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하고, 그래서 받은 그 달러로 사회간접자본(도로, 항만 등)을 건설하는 등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할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대한민국의 간호사와 광부가 멀고 먼, 낯선 땅 독일로 인력수출(?)을 하게 됩니다.


서독(독일)은 간호인력과 광부인력이 부족했고, 대한민국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서독에서 원하는 만큼 똑똑하고 야무지며 첵임감 있게 업무를 할 수 있는 인재가 많았기에 양 국가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간호사와 광부의 인력수출(?) 대가로 독일은 대한민국에게 공공과 상업차관을 합쳐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3,700만 달러 상당)의 유상원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던 대한민국에 간호사와 광부의 파견으로 엄청난 차관 획득에 성공했고, 이는 한국 경제발전의 하나의 원동력이 돼었다고 모두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간호사와 광부들이 받은 월급을 대부분 한국으로 송금함으로써 달러 획득의 주요 원천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잠시 한국 간호사의 파독 과정을 살펴볼까요

 

1957년 / 주한 독일인 신부 파비안 담이 경북 김천 성의여자고등학교 졸업생 총 30명 선발파독

1962~1976년 / 재독 의과대생 이종수, 이수길 및 독일 종교 관계자 개별 주선으로 간호사 파독

1966. 4.. 28 /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의해 간호사 128명 파독

1968. 10. 3 / 한, 독 정부 간 '한국인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모집 요강' 합의

1969. / '한, 독 정부 사이에 간호원 진출에 관한 협정 체결'

1970. 6. 18. / 서독병원협회 사무총장 M.uler 박사 내한, 간호원 파독협의

1970. 6. 28 / '유자격 한국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독일 병원 취업에 관한 협정'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1971. 1. / 협정서 발표

1971. 3. 27. /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 간 '유자격 한국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독일 병원 취업에 관한 협정' 서명

1971. 7. 29. / 양국정부 협정에 서명 완료

1974. 10. 22. / 협정기간연장 및 내용이 보강된 제2차 협정 체결

1975. 7. 9. / 독일 연방노동성은 협정국, 한국과 필리핀 이외의 비유럽계 간호요원의 서독 병원 취업금지 발표

1975. 8. 14, / 현방노동성 기혼자의 서독병원취업 및 내독금지 발표


[자료출처 - 파독전시관 설명패널(한국 간호사의 파독 과정)


남해 파독전시관


그럼 남해 독일마을에 조성된 파독전시관을 둘러볼까요.


전시관 건물 전경 - 마을 광장 중앙에 위치합니다


먼저 입장권(1천 원)을 구매하시면 전시실 입구로 내려가는 기다란 복도형 공간이 나옵니다.

파독전시관은 지하공간에 조성되었습니다. 건물이 상당히 작은데, 이 광장 지하공간이 전시실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아래 사진과 같이 복도형으로 내려가는 공간이 생겼는데, 마치 파독 광부들이 작업을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연상시킵니다. 건축설계 과정에서 그런 의미를 두고 설계하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통로식 슬로프 이동 공간 벽며에는 시대연표, 독일마을 조성 내용을 소개하는 패널이 배치되었습니다.


실제 전시실 입구에 광산 막장형태를 연출했습니다.


광부의 심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라는 의미이지 않나 합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아이의 뒷모습입니다. 얼굴은 안 나오니 용서하시길~~~


이렇게 복도식 슬로프 공간으로 내려가면 전시실이 짠하고 나타납니다.


전시실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우측에는 광부 관련 유물과 광부들의 파독 과정과 생활에 대한 설명이 관련유물과 함께 전시됩니다.


좌축에는 간호사 관련 테마전시인데요. 간호 파독의 배경과 과정. 서독에서의 생활을 당시의 유물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좌측이 광부 관련 쇼케이스 우측이 간호사 관련 쇼케이와 유물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영상실이 있습니다. 프로젝트 영상으로 파독의 시대적 배경과 독일에서의 근무생활, 독일마을 조성 내용을 다큐형식의 영상으로 상영됩니다.

영상 보다 보면 눈물이 쪼끔 나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전시실을 관람하면 다시 복도식 슬로프를 따라 위로 올라갑니다. 전시실 퇴장 공간입니다.




이렇게 해서 외부로 나오면 다시 독일마을 광장에 서게 됩니다. 즉, 독일마을 광장 아래 지하공간이 전시공간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간호사, 광부분들께 빛을 진 게 있다.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는데 전시관람을 마치고 나니 더욱더 그런 생각이 많이 들게 되었습니다.


파독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20대 때 읽었던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 '한강'을 통해 진즉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잘 묘사되어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소설 '한강'이 훨씬 더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참고로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일제강점기~1980년대)를 관통하는 소설입니다.)


전시관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과 문화마저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던 간호사와 광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물론 개인적으로 여러 사정이 있어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가긴 했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당시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업무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왜 간호사이고, 왜 광부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료계로 치면 의사도 있고, 산업계로 치면 용접공도 있을 텐데...


제 생각엔 그만큼 간호사와 광부의 일이 힘들고 고돼서 독일 내에서도 인력수급이 쉽지 않았던 분야이지 않나 합니다.  


특히 간호사 업무는 전문성도 요구되면서 고되고 힘든 업무를 버텨내야 했기 때문인데, 당시 한국의 간호사들이 전문성과 사명감도 강하고 인내력도 있어서 독일에서 선호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인력수출(?)로 대한민국은 많은 차관을 들여와 경제발전의 종잣돈으로 사용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분들께 빛을 진 게 분명합니다.



간호사법으로 사회가 시끌시끌합니다.



1970년대를 지나 이제 대한민국은 간호사를, 광부를 수출하는 나라에서 벗어났습니다.


광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정선, 태백, 문경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탄광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여러 경제적인 면에서, 정치적인 면에서 광산업과 광부들, 지역에 배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옛 탄광지역이 문화관광시설로, 카지노관광시설로 변모했습니다. 광부들의 고된 삶은 이제 박물관 쇼케이스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고, 가끔 옛 광부님들의 막걸리 한잔의 안주로 남아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간호사들은 어떤가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 와중에 최근 간호사법으로 사회가 시끌시끌합니다.

제가 관련법에 대해 잘 모르고 관련자는 아니지만, 생각해 봅니다. 그 어려운 시절 간호사들에게 진 빚을 일부라도 갚게 되는 계기가 이번 간호사법이 아닐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또한 반대하시는 단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단체는 본인이 속한 단체와 관련된 법을 정부와 상의해서 추진하고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것도 개인 생각입니다.


그렇잖아도 경제적으로 힘들고 사회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는 이때, 간호사법이라도 원만히 잘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초등학생 두 아이와 함께 둘러본 남해 파독전시관.


소영상실에서 같이 영상을 볼 때 어린아이들이 숙연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싱그런 5월, 혹 남해 근처로 여행 계획이 계시다면 꼭 독일마을을 둘러보시고 파독전시관을 관람해 보시는 게 어떤가 추천드립니다.


근처 독일가정식 식당도 맛과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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