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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형 Jun 06. 2024

신념으로 지켜내다, 울릉도 안용복기념관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증인, 안용복의 시작은 어떠했을까?

밥보다 비싼 브랜드 커피를 매일매일 맛있게 먹는 분들도, 1원이라도 더 싼 주유소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지금, 그 귀하디 귀한 오일이 무려 140억 배럴 묻혀 있다는 포항 앞바다 동해.

한국과 일본의 동해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 독도의 가치는 모르면 몰라도 140억 배럴의 원유보다 더 값진 가치가 있는 작은 돌섬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분은 아예 폭격기로 폭파해 버렸으면 시원하겠다고 했다는 그 섬. 동해에 홀로 서있는 독도.

대한민국은 당당히 주권국으로서 무장경찰을 상주시키며 지키고 있고 일본은 다케시마라 칭하며 호시탐탐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고 있는 독도.


오늘은 그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증인, 안용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물관 기행으로 보는 울릉도 역사투어 코스

독도로 가기 위한 관문은 울릉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울릉도부터 현대의 울릉도 역사를 재미있고 쉽게 이해하시려면 울릉도에 있는 박물관을 순서대로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순서대로 보는 것이 좋은가? 바로 시간적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 볼 수 있게 때문입니다.


1) 우산국 박물관 : 울릉도에 세워진 고대국가 우산국의 역사와  전설 고대 유적과 유물을 소개합니다.

                         울릉도가 어떻게 생성되었고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와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우산국 박물관

  2) 안용복기념관 :  독고영유권의 주인공 안용복의 생애와 독도가 우리나라(조선)의 영토임을 일본으로부터

                           확답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기념관


안용복 기념관

 3) 울릉수토역사전시관 : 안용복 사건 이후 숙종은 울릉도의 출입을 금지하고 수토사를 2~3년 주기로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함과 동시에 불법 침입한 일본인을 추방하는 수토정책

                                  (搜討政策)을 폈는데, 이러한 수토정책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전개, 수토사

                                  인물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


울릉 수토역사 전시관


4) 독도박물관 :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논박할 수 있는 사료를 정리하며 이론적 토대를 다지고 있다.

                     또한 독도 및 한국해(sea of korea)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데, 독도의 역사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영토 수호의 첨병, 독도경비대에 대한 소개와 관련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독도 박물관

이렇게 울릉도에 있는 4군데의 박물관을 순서(우산국 박물관 - 안용복 기념관 - 울릉 수토역사 전시관 - 독도 박물관)대로 관람하시게 된다면 아마도 울릉도의 생성부터 고대국가, 조선시대 수토정책과 독도 영유권 분쟁의 핵심 인물, 안용복. 그리고 현재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독도의 영유권 분쟁에 대한 각종 사료 등을 만나게 되면서, 울릉도와 독도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궤적을 한눈에 꿰뚫어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한 군데를 더 소개한다면. 울릉 수토역사 전시관과 짝꿍을 이루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울진에 있는 수토문화 전시관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울릉도에 있는 수토역사 전시관과 주제가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울릉도에도 있고 울진에도 있을까요?


수토는 말 그대로 수색하고 토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조선시대에는 울릉도가 공도(섬을 비운다) 정책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죄를 짓거나 해서 도망 다녀야 할 사람들이 몰래 섬으로 들어가서 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일본에서도 넘어오기도 했고요. 따라서 조선 숙종 때에는 정기적으로(3년에 한 번) 수토사를 보내서 울릉도를 수색, 토벌하는 정책을 했습니다.


그럼 수토사가 울릉도로 가기 위해서는 준비해서 출발하는 곳이 있어야겠지요?


그곳이 바로 울진입니다. 아래 오른쪽 사진 보시면 대풍헌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서 왕의 명령을 받은 수토사가 울릉도로 수토를 가기 위한 준비를 했던 곳입니다. 배도 준비하고 군사도 준비하고 했겠지요.

지금은 배를 타고 쾌속선은 2시간 30분. 대형 크루즈는 7시간 남짓 걸리는데, 조선시대에는 울릉도 가기가 쉽지 않았겠죠. 기상예보도 모르는데... 그리고 무동력선이므로 바람을 이용해서 가야 했으므로 울진에서 출발해 울릉도로 가는 길이 짧거나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마 이곳 울진 대풍헌에서 수개월을 준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토사가 머물었던 건물의 이름이 대풍헌이었을 겁니다. 대풍헌. 즉, 크고 순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 지칭되겠죠. 바람이 있어야 가니깐요...


울진 수토문화전시관   /   울릉도로 향하는 수토사 상상도   /   대풍헌


안용복과 독도

오늘 주제는 안용복 기념관인데 서언이 너무 길었습니다. 울릉도를 너무 사랑해서...

안용복은 안용복은 숙종 때의 사람으로 동래(東來) 출신이었는데, 왜관이 가까이 있어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 그는 나중에 장군이라고 자칭했으나, 태생은 조선의 천민으로 민간 관직에 머문 바 없는 일개 사노비였다. 능로군(能櫓軍)에서 복무하여 부산 동래에 주재했던 왜관을 자주 왕래하다 보니 일본인과 대화를 했던 탓에 일본어에는 능숙했다고 한다. 한 편으로 일본어 통역도 맡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그저 그런 평범한 조선의 천민 출신이 어쩌다 독도 영유권의 역사적 햄심인물이 되었고, 울릉도에 본인의 기념관까지 떡하니 세워졌을까요?


그 시작은 안용복의 어업활동, 즉 고기잡이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안용복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로 올라가서 다른 어민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울릉도에 일본인들도 고기잡이를 하고 있게 되고 결국 서로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 조선, 일본어부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때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강제로 끌려서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이것을 안용복의 1차 도일(피랍) 사건이라 합니다.


사실 안용복과 독도의 역사적 전개는 간단합니다. 1차 피랍되어 일본으로 간 안용복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납치 부당함과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대마도주가 안용복 일행을 고문했다고 조선 정부가 항의할까 봐 안용복과 박어둔을 2년간 동래 왜관에 가두고(연금) 약과 밥을 주어 회복시킨 다음에 조선에 표류한 어부를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풀어주게 됩니다.


이때부터 안용복의 피랍과 송환 처리는 단순한 개인의 월경(越境) 문제가 아닌 두 섬에 대한 조선과 일본 정부의 공식적 영유권 다툼, 즉 울릉도 쟁계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용복이 고기잡이하다가 일본 어부들과 싸우다가 끌려갔는데, 이제 이 사건은 본격적인 독도 영유권 문제의 핵심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인생사 참 알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저 그런 조선의 천민 출신의 안용복이 처음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고 수호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안용복은 독도 수호의 아이콘이자 역사적 근거, 단초로서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2년간의 구금이 끝나고 풀려나온 안용복은 1696년에 울산에서 순천 송관사의 승려 뇌헌의 배를 포섭하고 11명을 모집하여 다시 울릉도로 출항을 나서게 됩니다. 이는 고기잡이 출항이 아니라 일본에 다시 항의하려고 작심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안용복이 왜 다시 사람들은 모아서 일본으로 갔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울릉도에서 고기 잡다 일본인들과 싸워서 일본으로 끌려간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다시 가게 된 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인데 일본인들이 자기네 땅인양 넘나드는 것에 분개했는지,


역사는 이렇게 기억합니다.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협상 끝에 결국 일본의 막부는 두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했으며 이곳에 대한 출입을 금지할 것을 결정했지만 이후 울릉도와 독도에서의 이권을 노리던 대마도에서 막부의 명령을 지연시키는 것을 계기로 안용복은 영토 문제 해결을 결심, 1696년 3월,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고자 했다. 이것을 안용복의 2차 도일사건이라고 한다.


어쨌든(개인적 복수인지, 조선 영토 수호의 신념인지 모르겠지만) 울릉도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그곳의 일본 어민들을 몰아내고 추격하는 과정에서 오키주(伯耆州)에 표류했으며 이후 그곳의 태수와의 담판을 결심, 스스로 조선의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 칭하고 불법침입을 항의했습니다.

이 항의와 관련하여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 임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를 꺼내 두 섬이 강원도에 속해 있는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서의 말미에 기록된 조선의 팔도 중 하나인 강원도에 “이 도(道)에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속한다”는 주석이 부기되었습니다. 오키주 태수는 두 섬이 이미 조선에 속하였으니 혹시 다시 이곳을 침입하는 일이 있다면 무겁게 처벌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안용복은 같은 해 8월, 일행과 함께 강원도의 양양으로 귀환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1696년 에도 막부는 다음과 같이 죽도도해를 금지했습니다.


대마도주는 1696년 10월, 조선의 역관에게 막부의 뜻을 전달하고, 1697년 2월에는 동래부사(東萊府使)에게 서계를 보내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공식적으로 확인했고  이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재천명되었으며 울릉도 쟁계는 조선의 승리로 종결되었습니다.  


이제 안용복은 역사적 쾌거를 이루고 귀국하는데, 가까운 거리인 경북, 경남으로 오지 않고 강원도의 양양으로 돌아서 귀환하게 됩니다.  


이는 대마도주의 술수에 걸릴까 봐 호키슈를 통해 조선의 강원도로 귀국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강원 감사는 안용복을 붙잡아 뭐 하다 왔는지를 캐물었고 일본에 갔다 왔다고 하자 허가를 받지 않은 월경죄로 하옥 후 다시 의금부로 보냅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논의가 벌어졌는데 울릉도 영유권을 확실히 하고 일본 정부에게까지 확언을 받아온 점 등은 대다수 관료들이 다 공(功)으로 삼을 만한 일로 보았습니다. 특히 에도 막부의 월경 단속 약속이 들어오자 남구만은 아예 이는 역사적인 쾌거라고 칭찬했고 대소 신료들이 공이 "능히 죄를 덮을만하다"라고 주장했으나 윤지완이 "하지만 그렇다고 안용복의 공무원사칭죄와 무단 월경죄를 처벌하지 않으면 흉내 낼 이들이 많을 테니 처벌을 아예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하여 사형은 면한 대신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안용복이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언제 사망했는지 등은 전하지 않습니다. 출신이 관직과 아무 연관이 없는 평민이었던 만큼 유배 기간 중에 조용히 살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용복 사건 이후 숙종 대에는 울릉도 인근에 대한 감찰이 강화되어 원칙적으로 3년에 1번씩은 울릉도 인근을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이 부분의 역사적 전개는 울릉수토역사전시관에서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다.


안용복 이후 조선에서는 고종 때까지 울릉도 인근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어쨌든 안용복이란 인물이 대단한 분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집인가 신념인가...

시작은 참 단순한 것 같았습니다.

조선은 건국초기 자국민의 보호와 일본의 불법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섬에서의 거주와 출입을 금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했는데,

이를 어긴 안용복 일행은 울름도 인근으로 고기 잡으러 갔다가 일본어부들을 만나고... 이내 싸움이 벌어지고. 인원이 적었던지 일본으로 끌려갔고... 그런데 안용복은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조선 땅인데, 내가 왜 우리 땅에서 고기 잡다가 일본 왜인들에게 끌려와야 하는 거지...

안용복은 일본말도 능했으므로, 한껏 목소리 높여 본인 납피의 부담함. 울릉도 독도의 조선 영토임을 강하게 어필한 것 같고 일본 막부는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1차 도일이 끝나고 부산 동래로 돌아왔지만, 안용복은 2년간 왜군에 의해 동래왜관에 갇히게 됩니다.

안용복은 2년 동안 무척 열받았겠죠. 왜 내가 동래왜관에 감금돼야 하나...


2년 만에 풀려난 안용복은 사람들을 모아 다시 일본으로 가고 본인을 장군이라 자칭합니다.


어쨌든 결과는 좋았고, 그때의 사건이 지금 현재의 독도영유권 분쟁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료와 근거로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울릉도 어업. 일본인들과의 싸움.

일본에 의한 고문과 감금.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영토를 확인시켜 주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연의 사건이 아집과 신념이 되고 이내 집념으로 발전하고, 결국 그것이 독도영유권의 수호자의 아이콘 안용복이 되지 않았나?  일본어부와 싸워서 지고, 이내  끌려간 것도 분한데 고문까지 당하고 이후 2년간 감금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한 개인의 아집인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일본에게 다시 한번 확실히 인지 시키기 위한 신념인지, 그리고 그것이 발전된 집념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는 어쩌면 우연의 사건으로, 개인의 아집으로 시작하여 대의가 되고 그것이 신념으로 발전하여 결과적으로는 집념으로 발전하고 지금의 독도지킴이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지 않나...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우연한 일들, 가벼운 일들... 어쩌면 그것이 시작이 되어 나와 내 주변, 가정, 도시와 국가의 반전을 이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즐거운 상상도 해봅니다.


세상에 가벼운 일, 아주 적은 일이라고 치부할 만한 것은 어느 하나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알아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해야 할 일들이 그 어떤 누구에게 영향을 주고 나아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모티브, 모멘텀이 될지요...  



거친 동해의 바다를 가르며 울릉도와 독도 수호의 개척자가 된 안용복.

우리도 우리의 거칠기만 한  인생을 멋지게 개쳑해 봅시다. 거센 파도 두려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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