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는 두 바퀴로 굴러 간다. 자전거 위에 올라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페달에 발을 올리고, 페달을 구르는 것뿐이다. 자전거가 굴러 가는 동안은 두 바퀴가 땅에서 떨어질 수 없다. 두 바퀴가 땅에 붙어 멈춤 없이 지면을 밀어내야만 자전거는 서 있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바퀴’일 것이다. 인간의 육체로 다룰 수 없는 중량물들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줬으니까 말이다. 동그란 바퀴가 인간 문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음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함과 더불어,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진리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상에 나타난다. 윤회의 굴레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서 내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과연 탄생을 거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니,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기억과 생각 속에서 탄생은 주어진 것이다.
세상에 나타난 인간은 길 위의 자전거와 같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두 바퀴를 계속 굴려야만 한다. 삶이 고된 이유는 멈추지 않고 페달을 굴리듯 멈추지 않고 살아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은 세상에 우리가 나타난 이유와 마찬가지로 거부할 수 없는 천부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이 자전거 여행을 하다 들린 쉼터에서처럼, 삶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재정비한 뒤 다시 출발할 수 있다면 페달을 쉼 없이 구르고 있는 몸도 쉬어가고, 피로감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에는 쉼터가 없다.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쉼 없이 활동하는 육체에게 쉼이란 오직 죽음뿐이다.
죽음이 멈춤 없이 굴러가던 삶의 바퀴를 잠시 멈추는 쉼터가 아닐까. 한 모금 물도 마시며, 재정비하여 새롭게 페달을 굴릴 수 있도록 해주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쉼터. 문제는 이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가야 쉼터에 도착하는지, 그 쉼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쉼터 이후에는 어떤 길을 가게 될 건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렇기에 쉼터 없이 달리는 자전거에 오른 피곤한 여행자와 같이, 인간은 멈춤 없이 페달을 굴리면서도 어디로 향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가 타고 싶어서 오른 자전거도 아닌데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다. 왜 페달을 밟는지는 모른 채, 열심히 밟고 있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말이다.
쉼 없이 달리는 자전거는 반드시 쉼터에 도착한다. 삶과 죽음은 들숨과 날숨, 밤과 낮, 밀물과 썰물처럼 자명하다. 삶 이후에 죽음,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라는 윤회라는 것을 과학과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자연이 보여주는 원리를 바탕으로 유추해 본다면, 직관적으로는 윤회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영역을 물음표로 남겨 놓았다. 떡밥 회수가 안된 반전 영화처럼 말이다.
쉼터로 향하는 자전거, 죽음으로 향하는 삶, 모두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다양한 길을 택할 수는 있겠지만, 가고자 하는 곳은 하나이다. 남보다 빨리, 남보다 멀리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좋은 자전거를 타고 가든, 고물 자전거를 타고 가든 달라질 것은 없다. 가방에 재물을 가득 짊어지고 가든, 텅 빈 가방으로 가볍게 가든 달라질 것은 없다.
내 주변의 타인을 경쟁자로 볼 수도 있고, 동반자로 볼 수도 있다. 내게 주어지는 시련을 고통으로 여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게 볼 수도 있다. 니체는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시련과 고통은 피할 것이 아니라 더해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멈출 수 없는 여행에서 내가 더 강해진다면 보다 수월한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고, 강해진 힘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에게 나눠준다면 이보다 이상적인 여행길은 없을 것이다.
바퀴는 쉼 없이 굴러야만 서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자전거 위에 오른 채 세상에 나타났다.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에서 쉼 없이 페달을 굴려야만 하는 운명이다. 쉼터는 오직 죽음뿐이고,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멈출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삶을 살든 목적지는 정해져 있는데, 다행히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페달을 밟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자전거에 오른 인간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길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욕심을 확장시켜,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좋게”를 추구하는 첫 번째 선택지가 있고, 이 길의 끝을 명확하게 인식해 타인을 동반자로 바라보며, 시련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마주하며 강해진 힘을 동반자에게 나눠주는 두 번째 선택지가 있다. 물론 두 가지에 속하지 않은 무궁무진한 선택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뭘 선택하든 우리의 삶은 그렇게 펼쳐질 것이다.
싯다르타가 이야기 한 것처럼 모든 것은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고, 어느 주식 투자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모든 이는 시장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 간다.
멈추지 않고 굴러가도록 만들어진 바퀴는 최고의 발명품이면서,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바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발견’할 것일 수도 있겠다.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이지 어디에 도착하느냐가 아니다.
인간은 죽음 이외에 그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생텍쥐베리 - 사막의 도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