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파키스탄에서의 생활도 보름 남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것 같은데, 또 막상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면 짧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새로운 환경에 대한 어색함과 신기함이 가득했었다.
내가 살던 곳의 환경과 내가 살던 모습과 다른 이들의 삶은 팍팍하게 느껴졌고, '내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 답을 '아니, 절대 못 살아'라고 내리곤 했었다.
지금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처럼 쓸모없는 자문자답이 있었을까 싶다. 이들의 삶을 내 삶의 틀에 끼워 맞춰보며,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쉽게 해버린다. 애초부터 각자의 틀은 다른데 붕어빵 기계처럼 같은 모양으로 찍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이 거대한 편견이고 아집이다.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며,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틀린 것, 다른 것에는 주어가 빠져 있다. 주어를 포함해 다시 기술한다면 '나와 틀린 것', '나와 다른 것'이다. 나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내 붕어빵 틀 속에 남의 붕어빵을 가져다 대보는 꼴이 된다.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기준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내 눈에는 그들의 삶이 팍팍해 보이겠지만, 그들은 고유의 삶을 살고 있기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른 것도 틀린 것도, 많은 것도 적은 것도 떠올릴 필요가 전혀 없다.
우연히 지금의 몸을 얻어 내 몸이 속한 현상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는 '삶'만 자각하면 내 삶이 소중해지고, 자연스럽게 좋은 것을 보고, 먹고, 경험하고 싶어진다. 현상계에 가득한 물질은 바로 이 부분을 자극한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첫 단계는 살아가고 있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는 '죽음'을 자각해야 한다.
자연은 '생과 멸'을 반복하고, 이로부터 피해 갈 수 없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에 취한 인간은 마치 기분 좋게 술에 취해, 해가 뜨는 것을 잊고 있는 이처럼 오로지 '삶'만을 생각하며 '죽음'을 외면한다.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어떤 붕어빵을 만들어 냈더라도 결국은 고물상에 가서 녹여질 운명인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죽음', '공허', '텅 빈' 곳을 자각하면, 삶을 외면하고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며 집단을 와해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개인은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뭐? 허무함을 자각해야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류시화 시인의 책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허무주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며, 차단된 미지의 세계인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내가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불순물을 태워버릴 수 있는 방법이다. 불순물을 태워버리면 비로소 반짝일 수 있다. 물질문명이 두려워하는 것은 허무주의에 빠진 인간들이 아니라, 물질의 도움 없이도 반짝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물질문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질이 정해놓은 '자극과 쾌락의 길'을 따라 걷는 순한 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로를 이탈해 본질적 의문이 가득한 공허하고 비어있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양털을 벗어던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날카로운 정신을 가진 한 마리의 늑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