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전 세계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가두었던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는 서로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물리적 충돌을 거듭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전쟁도 모든 현상이 그러하듯 끝났고, 평화롭게 보이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제야 전쟁에 참여했던 여러 국가들은 그들의 계산서를 확인해 보았다. 패전국은 말할 것도 없이 거대한 국가적 피해를 입게 되었고, 승전국도 전쟁을 수행하며 입은 손해가 컸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속하지 않았던 미국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군수물자와 무기를 조달하며 크게 성장했다.
사실상 1,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승자는 미국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지금 미국이 갖고 있는 세계 패권국으로의 지위는 그때 만들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대륙 내에서도 미국과 같은 수혜를 입은 국가들이 있었다. 바로 중립국으로 남아 있던 스위스와 스웨덴, 덴마크 등의 북유럽 국가들이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태풍의 한가운데, 유럽 대륙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기존부터 이어진 안정적인 국가체제 내에서 영토를 보존하며, 전쟁의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을 정치의 최후 수단으로 묘사했다. 제한된 재화의 분배를 담당하는 것이 정치라면, 정치 행위자들의 합의가 평화롭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 최후에 발현되는 정치형태가 물리적 충돌,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쟁 이전에 정치가 있고, 전쟁과 정치는 그 본질이 같다고 본다면, 국회에서 망치로 문을 부수고, 의사봉을 두드리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신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수류탄을 터트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치열한 세계대전 속에서 미국과 중립국이 수혜를 본 것처럼, 정치 놀음 속에서도 어느 한 편에 속하는 것보다 중립 포지션으로 열매를 따먹는 것이 좋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활시위 같아서, 한쪽에서 당기면 끌려갔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이런 현상은 헤겔의 ‘변증법’의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느 한 편의 주장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편의 주장이 생겨나고, 이들은 마찰 또는 합의를 거쳐 어느 한 지점에서 합치된다. 변증법의 예시는 정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지금 힘을 갖고 있어도, 다른 쪽의 견제는 지속될 것이고, 그 힘은 약화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지금의 여당은 계속 여당일 수 없고, 언젠가는 야당이 될 것이고, 지금 야당이라도 계속 야당일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군자금이다. 군자금이 충분하면 전쟁에서 적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정치는 안 그럴까? 정치도 자본의 영향을 받는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제도들이 학자들에 의해 설계될 때에는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현실에 적용되어 시간이 흐르면 자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과두제든 민주주의든 어떤 체제든 부가 독점되는 순간부터는 자본이 정치를 움직이는 현상이 발생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본은 활시위를 당길 힘도 갖고 있고, 놓는 힘도 갖고 있다. 하지만 계속 당길 수도, 한없이 놓아버릴 수도 없다.
활시위가 당겨지는 편에 속하는 것과 활시위가 놓아지는 편에 속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내 삶에 유리할까? 어느 한 편에 속해 감정 이입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때는 기분이 좋다가도, 반대 방향으로 저항이 생길 때에는 기분이 나빠진다. 마치 야구팀을 응원할 때처럼 말이다.
자본은 대중이 그렇게 어느 한 쪽에 서있기를 원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화살이 날아가서 꽂히는 과녁이지, 화살을 당기고 푸는 행위가 아니다. 어느 한 쪽에 속해 있으면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자본은 행동의 자유를 얻고, 보다 과감하게 활동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정치 참여는 민주주의 국가에 속한 국민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플라톤의 설명과 같이, 부의 독점이 이뤄진 환경에서는 어떤 제도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저 그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 꼴일 수도 있다.
국가에는 큰 해를 입혔으나, 자본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정책이 다수의 국민의 열망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의 정책이었다고 알려지게 되면, 그 대통령을 뽑은 이들은 그들의 선택을 변호할 것이고, 반대의 사람들은 그 대통령을 뽑은 이들을 저주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과거 종교가 지니고 있던 불가침의 영역으로 신성시하면 자본이 파 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을 악하다고 보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선과 악’이라는 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어느 한 편에 속하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인간 사는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싯다르타가 세상을 ‘고 苦’로 정의한 바와 같이, 개인의 고통, 사회의 고통, 국가의 고통은 필연적인 것임을 알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활시위가 당겨졌다가 풀어지며, 화살은 날아간다. 활시위를 당기고 풀어낼 힘은 자본이 갖고 있다. 하지만 활시위가 당겨져도, 결국 풀어지며 화살이 날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과 중립국이 수혜를 본 이유는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치 관련 기사들을 가볍게 씹어주며, 그 뒤에서 움직이는 자본에 집중한다면 세상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고, 그 방향으로의 투자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반복되는 밀물과 썰물에도 그 자리를 지키며 불을 밝히고 있는 등대를 향해 나아가는 배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신건강에 너무 유익하다는 것이다. 답 없는 문제를 풀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