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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연못 Jan 26. 2024

잠자는 일

24년 1월 15일

오후 10시 8분

꿈에서 나는 내가 쓴 시와 글을 모아 드디어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활자로 인쇄된 종이 위에 누워 있는 내 글에서는 빨간 피가 끓어오르며 흘렀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게 된다는 것, 손에 잡히는 적당한 두께와 무게를 가진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에 눈물이 나왔다. 그 눈물은 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밀려 나와서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붉은 덩어리들을 뱉어낼 때마다 내 몸 전체가 뜨거워졌다. 신열에 정신이 아득해진 사람처럼 모든 것이 흐리고 어지럽게 뒤섞이며 흔들렸다. 고통스러우면서 행복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단단한 나무 방망이로 머리를 계속 맞는 것처럼 두통이 있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어깨와 목이 잔뜩 뭉쳐 뻐근했다. 전날 설거지를 하지 않고 잠에 들어 부엌이 지저분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끌고 커튼을 젖히고 거실과 안방의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열을 조금 식혀주었다. 기름기가 잔뜩 낀 접시들을 뜨거운 물로 헹구고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아침을 거르지 않기 위해 훈제된 닭가슴살에 로즈메리가 재워진 것과 채 썬 양배추를 사 왔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두통에 효과가 있는 덱시브로펜 성분의 투명한 푸른빛의 연질형 캡슐과 감초와 박하 등 한방약재로 만들어진 약을 먹었다. 30분 정도가 지난 후 수면제와 안정제 다섯 알을 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은방울꽃과 장미 그리고 비누향이 나는 오일을 발랐다. 마릴린 먼로가 사용했던 샤넬 넘버 파이브 향수의 시리즈로 나온 보디오일이었다. 마릴린 먼로를 좋아해서 그와 같은 것을 바르고 싶어서 가지고 싶었던 것인데 마침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자 기분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마릴린 먼로를 만나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에게 이 향기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디오일뿐만 아니라 향수도 그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것으로 선물을 받았지만 특별한 외출을 할 때 뿌리려고 한 것이라 아직 한 번도 뿌리지 못했다.


사고 싶은 물감과 붓 그리고 기름통 같은 미술용품과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직업이 없었고 어렵게 취직한 곳도 몇 달 전에 그만두었기에 그것들을 살 돈이 없었다. 물감과 책을 사기 위해, 나도 내 돈벌이를 하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보았다. 아기띠를 메고 베이비페어에서 아기띠를 판매하는 직원을 구하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급여도 일이 끝난 다음날 입금이 되고 점심과 음료가 제공이 되는 일급 9만 원의 일이었다. 총 4일 동안 근무를 하니 36만 원의 돈을 벌게 될 수 있었다. 그 돈이면 물감 몇 개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도 몇 권을 골라서 살 수 있었다. 이런 내 계획을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내 건강을 염려하며 반대했다


언제 또 의식을 잃고 몸이 마비되어 쓰러질지 모르는 내 상태가 죄스러웠다. 혐오스럽고 불안했다. 평생 남들에게 피해만 줄지도 모른다는 무력감, 이러다 내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

그래도 나는 지금 살면서 처음으로 안전한 곳에서 살고 있다. 마침내 나도 집에 있는 것이다. 나에게 집은 항상 도망쳐야 하는 곳이었는데 그 집에서 나와 드디어 진짜 집이 생긴 것이다. 내일은 오전 11시에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점검원이 온다. 그전에 청소를 하고 목욕을 끝낼 것이다. 점검원이 가고 나면 양배추와 닭가슴살을 먹은 후에 진하게 우린 차를 마시고 필사를 하고 책을 읽고 기타 연습을 하고 요가를 다녀온 후 저녁을 차리고 평온하고 불면이 없는 밤을 보낼 것이다. 내게도 그것들이 주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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