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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연못 Feb 14. 2024

바늘

24년 1월 25일

오후 11시

정확히 오후 11시다. 시계가 11시를 알리는 순간 Matt Elliott의 The Failing song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상현망간의 달이다.

가죽재킷과 수영복 그리고 잡다한 것을 중고로 팔아 모은 돈으로 물감을 샀다. 37ml짜리 유화물감 튜브 세 개를 골라 담았는데 2만 4천 원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Williamsburg의 Dianthus pink, Cinnabar green 그리고 GAMBLIN의 manganesse Blue Hue. 새로운 그림을 시도해 보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습기가 느껴지는 대기 속의 풀과 꽃 그리고 하늘을 그려볼 생각으로 고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그린 그림 속에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좋은 인상을 주는 건 거의 없었다. 이번에 그리게 될 그림은 어쩌면 다른 사람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밝고 싱그러워서 생명력이 느껴지는 색감의 물감으로도 누군가 보기에 암울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나의 내면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씻는 행위. 특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목욕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남들이 나에게 그만 씻으라고, 너무 자주 씻는다고 할 정도이다.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씻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때부터였다. 비 오는 날 유치원이 끝난 후에 투명한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기 위해 혼자 아파트 승강기를 탔다가 교복을 입은 중학생에게 성폭력을 당한 것과 집에서 지속적으로 친오빠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한 것이 그 이유였다. 더러운 가죽으로 뒤덮인 그들의 몸이 내 피부에 닿고 몸에 들어온 것에 대한 불쾌감, 구역질 나는 끈적이는 침, 뜨겁고 역겨운 숨결이 내 머리카락에 엉겨 붙어 아무리 씻어도 그 냄새와 끔찍한 느낌이 사라지질 않았다. 빨갛게 잔뜩 부어오른 내 성기는 따갑고 간지러웠다. 물이 닿으면 더 따갑고 쓰라렸지만 어떻게 해서든 계속해서 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날이 추워진 후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색깔이 있고 향기가 나는 입욕제를 넣어 몸을 담그는 날이 많아졌다. 거의 매일 그랬다. 예쁜 색깔의 따뜻한 물속에 목까지 몸을 담그고 나와 촉촉한 바디크림을 듬뿍 바른 후에 보디오일을 손목, 가슴 그리고 목에 덧발랐다. 몸이 건조한 상태, 내 몸에서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면 오물을 뒤집어쓴 듯 불쾌하고 불안해졌다. 건조해서 피부가 땅기는 게 느껴지면 피부를 덮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향기로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주변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하고 그건 내 이인증을 더 심해지게 했다.

내일은 이불을 전부 세탁하고 건조해야겠다.  눈은 아직도 녹지 않아 길이 꽁꽁 얼어있다.


24년 1월 26일

오후 11시 48분

피곤하고 발목이 시큰거린다. 발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한 것은 3년을 만난 애인이 폐가 터져서 갑작스럽게 죽은 후 그의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날 버스에서 내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계단에서 구른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내 발목 속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돌아가고 이따금 그 바늘은 나를 마구 찌르기도 한다.

이불 빨래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었지만 그때는 오후 4시에 가까운 시각이었기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바늘을 통과하는 실이 갈라지고 엉켜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엉킨 실이 걸려있는 바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엉킨 실을 가위로 잘라내고 새로운 실을 다시 바늘구멍에 넣기 위해 요가 수업에 갔다. 여자들은 각자 매트에 앉아 몸을 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형마트가 아닌 작은 마트들은 모두 조금씩 사라져 가고 그 자리를 편의점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 평균 올해는 60대 인구가 20대 인구를 넘어섰다는 것, 아이를 꼭 낳을 필요는 없다는 것, 평균 수명이 늘어나도 그런 건 돈이 많은 부자들에게나 좋은 것이지 평범하거나 가난한 사람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거나 남은 삶이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것.

발목의 통증을 사라지게 하려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크림을 발라 발목을 마사지를 해봤지만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끈질기게 남아 나를 괴롭혔다.

눈이 많이 녹아서 길에는 얼음조각이  널려있다. 만약 내일 볕이 좋다면 새로 산 물감으로 작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생명이 담긴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잠들기 위해 들어간 이불속에는 아직 풀리지 않고 엉켜 있는 실타래와 작고 차갑게 빛나는 뾰족한 바늘이 있었다.


24년 1월 27일

오후 10시 52분

매일 하루에 한 편씩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가정기도서를 필사하고 있다. 가정기도서의 1부 기원 행렬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읽어치우지 말라고 권하였던 브레히트의 지침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집을 처음 접했을 때는 비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차가운 비에 입고 있는 옷이 젖어가는 걸 즐기는 듯이 충격에 빠진 상태로 단숨에 한 권을 읽어버렸다. 독자가 자신의 시를 읽고 어떤 상태에 빠지게 될지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오로지 아주 건강한 사람들만이 감정에 직접 파고드는 1부 기원행렬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지 않기에 그의 당부를 어겼거나 그의 시를 읽을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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