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온유의 <유원>을 읽고
어떤 열일곱은 미안해하며 잠에서 깬다. 오늘 아침도 살아서 잠에서 깨어났음을 미안해하며, 누군가의 삶의 빚쟁이인 듯 자신의 빚을 헤아리며 미안해한다.
처음에는 원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이야, 행복해야 해,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원이야 행복해야 해. 그러나 ‘응원할게, 살아줘서 고마워, 다행이다’ 이 모든 게 원이의 가슴을 두드리고 눌러왔던 말임을 깨닫고 놀란다. 어떤 이에게 베푸는 기원의 말도 때로는 내뱉지 않고 가슴에 혼자 품어야 함을 깨닫는다. 어떤 선의는 오랜 세월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원이는 원래 어떤 아이였을까. 내가 나로 이루어지는 어떤 이유가 없었다면 원이는 어떤 아이였을까. 수현도, 정현도 어떤 아이였을까. 원이는 얇게 드리워진 모범생의 결계가 없는 좀 더 재밌고 밝은 아이였을까. 수현도 봉사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됐을까. 정현도 자신이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누군가를 투영하기 위해, 미워하기 위해 연기자가 되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들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이 슬프고 고됐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예정은 또 어떤 아이였을까. 예정은 모든 이의 기억 속에 완벽한 아이로 신화화되고, 예정의 단점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예정이 쓴 소설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투명인간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이 세상에 없는 예정이 원이를 통해 하는 행동 같다. 원이는 자신이 계속 예정이 선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증거품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본다. 그들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 누군가의 원래의 모습이라는 것. 그게 과연 있기는 할까. 사실은 이들이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이 모여 이들을 이루었음을 알게 된다. 원이에게 그 모든 일을 잊고 원래의 너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만든 너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피어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예정보다 한 살 더 먹은 원이는 그렇게 한 발짝 생에 다가선다.
아저씨는 언니의 기일에 꿉꿉한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선다. 그는 그렇게 모든 이의 일상에 꿉꿉하고 거북하고 덜 마른 채로 등장한다. 자신의 기일에 집에 온 예정은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처음 보는 아저씨를 보고 의아해하며 돌아서지 않았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가장 공들여 만든 인물은 원이도 수현도 아닌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인인 체하는 그가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 호인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금 가게 했는가.
원이와 수현은 옥상에서 노을을 보고, 불꽃놀이를 본다. 높은 곳에서 보는 붉은 것이 전부 화마만은 아님을, 어떤 붉은 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작은 축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원이는 알게 된다.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수현과 같이 보고, 느낀다. 그 작은 축제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수 있음도 원이는 조금씩 알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원이는 누군가를 증명하는 사람이 아닌 원이 자신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또 또 생각해 본다. 내가 나로 이루어지는 어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그 어떤 이유들과 그 이유에서 오는 사유, 반성, 자책, 슬픔, 반항 등으로 나는 나로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원이는 이제 높은 곳에서 날아오르며 성장하고, 마흔네 살의 나도 아직은 크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