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그럴 수 있어>를 읽고
어떤 글은 백김치 같다. 칼로 깔끔하게 잘라 깨끗하고 하얀 접시에 담은 백김치. 당연히 맛있고, 고춧가루가 없어 입 속도 지저분하게 하지 않고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느끼한 속을 달래주고 자극적이지 않다. 김치라 정겹지만 깔끔이 놓인 그 모습은 왠지 세련됐다. 양희은 님이 쓴 이 책이 그랬다.
읽는 내내 내 눈이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양희은 님의 목소리가 이 책을 읽어줬다. 우리는 양희은 님의 목소리에 참 익숙하다. 나레이션, 광고, 라디오에서 들은 목소리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사연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정말 잘 쓰신다, 이건 서울 말투야(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방 사람으로서는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겨운 말투, 소박한 소재, 따뜻한 목소리. 그러나 이렇게 편하게 읽히는 글이 편하게 쓴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우리가 양희은 님에게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읽다 보니 먹먹해지고, 눈가가 조금 젖어든다. 우리가 평생 보아 왔던 양희은 님의 이야기지만, 이것은 노년의 여성의 글이기도 하고, 우리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모두의 이야기이다.
왜 이렇게 글을 잘 쓰실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읽다 보니, 무려 1971년부터 라디오를 진행하셨다는 말씀. 그리고 예전에는 라디오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직접 쓰셨다는 말. 거기다 몇십 년간 그득그득 사연 품은 이야기들을 읽어오신 거다. 그렇다면 몇십 년간 매일 읽고, 쓰고를 해온 것이다. 그야말로 글쓰기 수련을 완벽히 거친 것이다. 더구나 매일 읽었던 그 사연들은 한 명 한 명의 사연자가 자신의 특별한 일을 정성 들여 쓴 글 아니던가.
또 노란색 옥스퍼드 노트에 펜으로 글을 쓴다는 말에 이마를 한 번 짚게 된다.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는 글이라니. 개칠한 원고라고 하지만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쓴 글은 그저 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중노동인가.
매일 목욕탕을 가고, 아쿠아반에서 운동을 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가끔 여행을 가고, 좋은 사람들과 앉아 겨자씨를 씹으며 웃고, 그리고 매일 무언가를 잊어버려 집에 돌아가기 일쑤. 라디오를 진행하고,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이 우리에겐 익숙하고 멋있지만, 나는 그녀의 저런 일상이 정겹고 따뜻하고 좋다.
피곤한 출근길, 그래도 벚꽃이 폈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날 힘들게 하는 누군가에게, 날 힘들게 하는 내 자신에게 말해봐야지.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굳어있던 마음 끝이 눅진하게 풀린다.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주신 숱한 애청자와 그 사연에 귀 기울이고 함께 울고 웃어준 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마이크 앞 의자를 지킬 수 있었다. 배우고 깎인 것은 또 좀 많을까. 남자 진행자와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훈련은 결혼생활에 버금가는 좋은 훈련의 장이었고, <여성시대> 앞으로 온 편지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석사, 박사 논문보다도 배울 게 많았다.
마지막 문장이 찡했다. 우리 마음 속 사연들이 그 어떤 석사, 박사 논문보다도 배울 게 많았다는 그 말.
잠깐만, 잠깐만 하다가 후딱 한 시간이 지났다. 남편이 깨워서 일어나 보니 벌써 6시 10분. ‘목욕을 하고 말끔해진 몸과 마음으로 원고를 쓰면 술술 써질 거야. 탁한 머리를 맑게 하는 데는 목욕이 최고야’ 생각하며, 방송국으로 직행해도 모자랄 판에 목욕탕으로 향했다. 매일 내 등을 밀어주는 분이 계신데 무얼 하고 계시든 간에 내가 등장하면 “내가 등 밀어 드릴게유~ 내가 해유~” 하며 내게 오신다. 손끝이 야무져서 비누칠도 잘하신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작은 일 같아 보여도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역시 좋은 마지막 문장. 등 밀어주시는 분이 양희은 님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금세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야무진 손끝, 그리고 그 일이 작은 일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작가의 태도. 모든 것이 작은 일 같아 보여도 작은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이렇게 일상의 작은 일들이 사실은 작은 일이 아님을 나지막이 알려준다.
그리고 뭐, 그 많은 상처들이 다 내 잘못인가.
하늘에서 느닷없는 똥바가지가 떨어졌고 하필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게야.
“네 잘못이 아니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
네 잘못이 아니야까지는 많이 듣던 소리다. 그건 익숙한 위로고 격려다. 그런데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라니. 그건 명령이다. 저 소리를 듣는 순간 양희은 님은 수십 년의 나이 차를 넘어 나에게 친한 언니가 된다. 그래,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자. 어깨에 고된 짐이 쌓여 있어도 고개는 빳빳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