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pr 21. 2024

우주의 가장자리에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의 미소>를 읽고

  쇼코는 나를 포함해 무채색과도 같았던 우리 가족에게 색깔을 주었다. 웃을 수 없을 것 같던 할아버지, 무기력하고 서투르게만 보이던 엄마는 쇼코의 미소에 같이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고, 헛웃음을 짓고, 서투른 웃음을 보인다. 그러자 몇 십 년이고 그 자리에 걸려 있기만 한 괘종시계 같던 우리들이 대앵~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멈췄던 괘종시계가 째깍째깍 울리며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살아가겠지, 서투르게 할아버지, 엄마처럼 살아가겠지 했던 나는 영화감독이나 작가가 될지도 쇼코의 말에 조용히 흔들린다. 결국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고 영화를 꿈꾸는, 아니 영화를 꿈꾸는 자신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할아버지에게 쇼코는 어떤 의미였을까. 50살부터 그 자리에만 있던 사람. 그는 쇼코와 일본어로 말하며 열심히 생활을 꾸렸던 젊은 시절 자신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 부끄러워 주지 못한 애정의 일면을 쇼코에게 보인다. 그것은 저기 일본에서 쇼코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이므로 할아버지는 부끄러움 없이 손녀에게 줄 애정의 소리를 그 곳으로 보낸다. 할아버지는 쑥쓰러워 평생 표현하지 못 했지만, 사실은 갓난아기 때부터 키워낸 손녀를 너무 사랑해, 그래서 그 사랑을 손녀에게는 표현 못 해 쇼코에게 그 사랑을 보인 것도 같다. 이제 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할아버지에게 쇼코가 전해주는 편지는 어떤 위안, 어떤 소일거리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쇼코의 미소에서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우울을 눈치챈다. 우울을 평생 알고 있던 사람이므로 쉽게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쇼코에게 수년간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녀의 안부를 묻고, 그녀의 생사를 확인한 것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소녀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할아버지. 그 둘의 우정. 그들은 내면의 우울을 앓으면서, 서로에게 편지로 따뜻한 손길을 보내는 우정이었을 것이다.


  쇼코는 언젠가는 저 먼 곳으로 갈 거라고 늘 말했지만, 그리고 나에게 작은 몇 마디 말로 저기 먼 곳으로 가게 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결국 A시에 머문다. 아마 쇼코는 어릴적부터 우울을 앓아왔을 것이다. 나와 할아버지에게 보낸 각각 다른 편지는 모두 다 거짓이었고, 모두 다 진실이지 않았을까. 쇼코에게 나는 저 바다 건너 살고 있는 평행세계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 A시 안에서 우울을 안고 사는 나 대신, 저기 한국에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쇼코가 보기에는 한없이 다정한 할아버지와 엄마와 사는 또 다른 내가 있다. 그 아이는 이제 서울로 대학을 가고, 미국으로 가고, 시나리오를 쓴다.


  나에 대한 쇼코의 감정은 여러 갈래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문장인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쇼코는 나에게 연애 같은 우정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평생 웃음 짓게 하지 못 할 할아버지를 웃게 해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꿈 없는 내게, 언젠가는 나는, 언젠가는 나는, 하면서 여러 꿈을 말하는 쇼코에게 자극을 느끼기도 하고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A시를 벗어나지 못한 쇼코를 보며, 쇼코의 집을 찾아가 수렁에 빠져 있는 쇼코를 보며 나는 어떤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거기에 미움, 거부감까지.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나의 말은 자신도 속이지 못하는 반어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내 방에 찾아오는 장면은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나에겐 그런 할아버지도, 나는 그런 방에 산적도 없지만. 그 작은 방에서 피운 할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느껴지고, 그 어색한 공기도 겪어본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비를 맞은 초라한 할아버지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바보같은 내 자신도, 팔뚝에 와 닿는 빗방울마저 느껴진다. 왜 난 겪지도 않을 일을 겪은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으므로, 나를 보살핀 누군가가 있으므로, 그를 지겹게 느낀 일이 있으므로, 그의 뒷모습을 본 일이 있으므로, 그를 무시한 적이 있으므로, 그래서 가슴 저민 일이 있으므로.


  엄마와 할아버지와 나는 한 방에서 자며, 셋 모두 각각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에 대해 정리하고, 나와 엄마는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나와 엄마도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나는 할아버지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고 피가 돈 존재, 엄마는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 우리는 다 그런 존재들.


  쇼코의 미소는 무엇이었을까. 차갑고 어른스러운 미소.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 나약함과 방어적인 태도를 숨기려는 미소. 미소가 아닌 미소. 우울을 숨기는 미소. 어떤 때는 부러웠던 미소, 어떤 때는 떼어내고 싶었던 미소. 누군가는 그 슬픔을 간파할 수 있는 미소.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었던 미소.


  다시 만난 쇼코는 유두 근처에 연둣빛 애벌레 타투를 했다. 쇼코가 말했던 그 많은 언젠가는 중에 이루어진 첫 번째 언젠가는이다. 그럼 이제 쇼코는 언젠가 말했던 그 언젠가는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마지막 쇼코의 미소를 보며 나는 가슴이 서늘해진다. 나는 왜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까. 나는 그 미소를 보고 무엇을 알아차린 것일까. 쇼코는 여전히 우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처럼 쇼코는 힘든 미소를 짓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여전히 서툴고, 앞으로도 힘들게 살아갈 것인가. 쇼코와 나는 열일곱에도 스물 세 살에도, 또 앞으로도 우주의 가장자리에 머물 것인가. 그리고 쇼코의 미소를 바라보는 우리는.


작가의 이전글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