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끝의 단비가 도시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겨주었습니다. 가로변 좁디좁은 장소의 배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가로수. 비 그친 뒤 그들의 몸도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겨우내 잠들었던 잎눈을 틔워내 칙칙한 몸뚱이에 걸칠 녹색 옷을 부지런히 짓고 있거든요. 파릇파릇 비집고 튀어나오는 여린 이파리들을 바라보면 경이롭기만 합니다. 도시인들의 갖은 천대와 훼손에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그들이 아닌가요. 그러면서 초록의 하모니를 이룬 퍼레이드가 도시민들의 바쁜 발걸음을 멈춰 우러러보게 하는 등 마술까지 부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심의 녹지가 자연 못지않게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참에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정원도 돌아보기로 했지요. 13년 전, 이곳을 선택하게 된 배경 1순위는 잘 꾸며진 외부조경이었어요. 우리 집 3층 베란다 창가에까지 치고 올라온 산수유나무 가지가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친근하게 여겨졌습니다. 저편 너머에는 이미 작은 숲을 이뤄 단풍나무·소나무·층층나무·벚나무·목백일홍·살구나무 등 키 큰 나무가 듬성듬성, 그 아래로는 눈에 익숙한 작은 키 나무들로 빼곡하게 둘러져 있었지요.
방마다 배치된 전면유리창에 투영된 초록들은 은닉된 숲속에 자리한 우리 집인 것마냥 신비함을 자아냈습니다. 전원에서 살았을 만큼의 풍광은 아닐지라도 도시의 처소로 이만하면 괜찮은 곳이라 여겼습니다.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사시사철의 변화를 가감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기대도 함께 했었죠.
몇 해를 넘기며 아름다웠던 정원이 그때의 모습을 잃어갔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3년을 주기로 가지치기 작업을 진행해 오기 때문이었죠. 아니, 가로수의 가지치기 작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파트에 식재된 나무들까지 무모한 일을 자행할 줄이야.
소나무를 제외한 나무들의 수고(樹高)는 형편없이 낮아졌습니다. 3층의 높이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로 잘 자란 나무들이, 이젠 그 아래로 굽어다 볼 정도로 낮아진 것이죠. 그 이후 조금씩 자라나고 있지만 나무 본연의 자태를 잃어버린 후였습니다. 강전지로 잘라나간 부분에서 가느다란 새 줄기가 촘촘하게 뻗어나 살려고 버둥대는 모습이 가히 기형적이었죠.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무에도 품격이 있는 법. 가지치기에 대해 식견을 달리하는 나는, 가는 가지도 아닌 굵은 줄기를 몽땅 자른 결과에 야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뭉뚝 잘린 나무를 쳐다보는 내내 언짢았고 괴로움에 진저리를 쳤지요.
뉴질랜드에서는 나무를 자를 때 주민들의 동의를 거쳐야하는 조례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형편과 대비돼 부럽기만 했습니다. 물론 아파트 내 나무관리 매뉴얼에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거치는 수렴과정이 있으나 형식일 뿐 약식 처리되기 일쑤였죠. 그리고 주민들조차 나무에 대한 관심이 적은 탓에 나무쯤이야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괜찮다는 무관심과 몰지각이 불러온 결과이기도 했죠. 게다가 잦은 이사로 이동이 잦은 아파트의 특성상, 주민의식이 제대로 정착될 리 없는 빌미를 관리자에게 제공한 격이란 생각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전지작업에 얹혀 사단을 키운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4년 전 아파트 대표회의를 거쳐 선정된 꽃가꾸기 사업에서 발단되었지요. 누구인들 예쁜 꽃을 가까이하고픈 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까요. 다만 고층 아파트 그늘 아래서 제대로 자랄 화초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이죠.
화초 키울 욕심이 앞서고, 심은 꽃에 그늘이 진다는 이유로 나뭇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훼손시키는 아파트 동대표가 탄생했습니다. 그 노인은 꽃 가꾸는 취미를 아파트 정원 내에 실현하고픈 마음이 크다 보니 자칭 조경전문가라 자신을 소개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간 저지른 행태를 보면 과연 전문가일까 하는 의구심을 일구게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노인 자신이 마음대로 나무를 자르려고 꽃가꾸기 사업단을 꾸린 것으로 짐작합니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남길수록 공기 중의 탄소의 흡입량이 높아지고 녹음을 제공해주는 등 우리에게 베푸는 자산의 가치가 매우 큽니다. 한여름 나무그늘이 주변의 온도 보다 2도 이상 내려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요. 정해진 자리에서 불평 없이 뿌리를 꿋꿋이 내린 채, 나무들은 그들만의 몫을 재생하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그들의 말 없음 속을 걷다 보면 생각의 말로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이 싱거워진다--- 아는 꽃나무 하나가 모처럼 말문을 연다. 꽃 하나 뜯길 땐 욕을 내뱉었어요. 가지째 꺾일 땐 침묵을 배웠지요.’ (황동규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름드리나무 앞에 서면 ‘큰 어른’ 못지않은 품격으로 다가와 경외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같은 나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관리자 편리위주의 행동에서 벌어진 일을 어찌 감당해야 하나요. 나무관리는 햇빛을 향한 굶주림의 나무가 없게 골고루 자라게 해주는 숲 관리차원에서 비롯됨을 상기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근래 들어 거론되는 ‘도시숲 관련 조례’ 소식이 눈에 띄게 반가운데요. 새롭게 조례제정을 할 때 가로수 외에도 아파트에 식재된 나무까지 공공재로 인식하고 관리하도록 지자체가 나서주길 바라는 내 마음이 그래서 절절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테니.
겨울철 나목에 고운 연두색을 입히는 봄철 작업부터 결실을 맺는 가을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수고한 잎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이 단풍이라 했던가요. 단풍으로 물든 무렵이면 산 전체가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노란색들로 어우러지며 모자이크 무늬로 절정을 이룹니다. 과연 우리도 생을 마무리할 즈음 어떠한 채색의 성적표를 받아보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