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오랜 숙원 중 하나였습니다. 빛고을 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혼자 나서기엔 여의치 않은 교통편 때문에 포기해왔던 장소이기도 했지요. 그러다 한 달여 전, 모 재단 모임에서 주선한 그곳 탐방 공지문이 날아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신청을 마쳤죠. 동행인들은 10대~70대의 다양한 연령대를 이뤄 통솔하기에 합당한 15명이 모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나는 예외 없이 최고령자로 손꼽혔고요. 일행 중의 한 중년남성이 “요즘 단풍철이 한참인데 거기 가지 않으시고 여기를 오셨어요.”라는 말로 반겨주었습니다.
기차로 2시간여 달려 광주송정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은 벌써 망월동묘지(국립 5•18 민주묘지)를 향해 달려가는 듯했습니다.
차마 그리워했던 곳에 도착해 발을 내딛으니 착잡한 마음과 더불어 옥죄어 오는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봉분 위로 내리꽂힌 맑은 햇살은 오래된 지각생을 반겨주는 열사들의 혼신처럼 느껴져, 그나마 마음의 부채의식을 덜어낼 수 있었어요. 대규모를 이룬 묘지의 방문은 개인적으로 처음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소설 속 ‘동호’의 실제주인공인 ‘문재학’의 묘와 마주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생 앳된 얼굴의 소년을 대한 순간, 시선 고정이 어렵더군요. 어린 나이의 동호가 끊임없이 실려 온 시신의 참혹성을 직접 목격하고 어찌 감당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머리 뒤통수가 총상으로 함몰돼 소실된 뇌와 피로 낭자한 시민군의 모습. 얼굴에서부터 젖가슴에 이르기까지 대검에 베인 어느 소녀의 어처구니없는 주검. 장기 일부가 밖으로 튀어나온 참상과 찰과상을 입은 주검들을 맨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던 일들.
작은 형의 마지막 귀가 닦달에도 “내가 뭘 했다고 죽어. 여기서 잔일(죽은 사람들 인상착의 기록) 거든 거 밖에 없는데.” 동호의 천진한 대답은 그와 같이 어린 학생에게 총구를 겨눌 군인들이 아닐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볍게 뒤집어 놓은 참화로 기록됐습니다. 외신의 한 기자는 베트남전쟁을 목격했지만 이토록 잔인무도한 살상은 그 전쟁을 능가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과 박기순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렇게 현장을 직접 돌아봐야 알게 되는 진실이 있습니다. 민주의 도화선이 됐던 ‘불꽃야학’을 이끌어온 위의 두 열사의 못다 이룬 젊음을 기리기 위한 곡이었던 겁니다.
훗날 이 곡이 5•18민주화운동의 노래로 정착되었고요. 시민군의 대변인을 맡아왔던 윤상원은 내외신기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엄청난 말을 남긴 채 죽음으로 산화했습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패배할 것을 뻔히 알면서 죽을 각오로 임한 저들의 높은 기상. 사무치도록 닮고 싶은 민주투사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려운 시대일수록 위인들이 배출된다더니, 끝 모를 열사들의 죽음이 이 시대 ‘광주의 정신’을 피워냈던 것입니다.
발걸음을 돌려 당시 격전지로 알려진 금남로 ‘전일빌딩 245’에 도착했습니다. ‘245’란 숫자는 군부 진압 시, 헬리콥터에서 난사한 총알이 그 건물에 박혀있는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죠.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파편의 흔적들이 보존돼 있었어요. 바라보는데 폐부를 찌르는 듯 간헐적인 통증이 전도되는 듯싶었습니다. 이어 다른 장소에서는 헬리콥터 모형과 함께 생생했던 그 한 편의 비극영상을 틀어주며 체험기회를 제공받기도 했습니다. 헬리콥터 공격의 진실을 끝내 인정치 않고, 고인이 돼버린 전두환 씨를 누구라 한들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한편 전일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로터리와 분수대를 중심으로 전남도청 건물이 있습니다. 지금 내부 수리 중이더군요. 도청 밖에 둘러진 가림막들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막아 되돌리게 했습니다.
한강 작가가 그들을 따라 밟아갔을 법한 현장을 뒤따르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특히 상무대 장면 묘사에서는 문장에 검은 실루엣을 드리운 현장들을 스쳐가며 전율을 느꼈으니까요. 5•18자유공원 안 한편에 상무대가 있습니다. 시민군들이 잡혀와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던 곳이었지요. 입구 마당에 군인들로부터 고초를 겪는 시민들 모형이 진열돼 있습니다. 압권은 철창 속 감옥이었어요. 좁디좁은 감옥에 촘촘하게 무릎 꿇린 시민들이 똑바른 자세에서 조금만 흩뜨려도 가차 없는 형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가장 큰 형벌은 독방 철창에 L자형의 자세로 주구장창 매달리게 하는 건데요.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어김없이 날아온 몽둥이 매질이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철창에 손과 발이 동시에 매달리는 형벌은 흐르는 땀으로 의해 철창을 잡은 손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매를 가했던 군인과 그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진 진압에 나섰던 가해자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꽁꽁 숨겨진 채,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노예 신분도 아니고, 불법이민자도 아니었으며, 범법자는 더더욱이 아닌 선량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정권을 찬탈하려는 군사반란 집단을 향해 온몸으로 맞선 민주항쟁의 투사였을 뿐입니다. 한때, 폭도로 몰고 간 보도가 만연했습니다만, 그들이 폭도였다면 완전 고립 속에서도 하나의 약탈 행위도 없었고 은행이 털린 일도 없던 수준 높은 질서를 유지해온 광주시민이란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전쟁을 불사하는 곳곳에서 주먹밥을 제공한 어머니들이 줄을 섰고, 모자라는 피 헌혈에 나선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 등등.
그렇게 불을 지펴 공동체집단을 이룬 사건은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끈 역사적 쾌거였습니다. 그때 선량한 시민을 학대했던 군인과 지휘관들이 지금쯤 70~80대 노인이 되었을 텐데. 살아있다면 저런 일을 저지르고서도 제대로 숨 쉬며 살아갈까요. 이처럼 단죄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로 인해 벌어진 우리의 비극은, 이념전쟁의 현실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낳았습니다.
민주의 중심에 우뚝 선 광주(光州), 이름 그대로 빛고을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된 계기는 우리민주 역사에 큰 전환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의 성지로 불릴 만큼 대단한 곳이라는 점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집니다. 방문객도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진 일은 이와 같은 ‘5•18민주화 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선정돼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었죠. 우리가 지금 무사하게 지낼 수 있던 점도 그들이 보여준 자주적 민주화의 열망과 높은 기상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 까닭일 테니까요. 결코, 여느 단풍놀이와 비교될 수 없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광주 망월동 묘역에 깊이 잠든 열사들이여, 당신들의 고귀한 죽음과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폭도가 아닌 진실 보도에 용기를 낸 해외기자들과 푸른 눈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님께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해외기자 당신들의 활약상이 없었다면, 진실이 왜곡보도로 억지 포장될 뻔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