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위 조상들과 천문학적 혈연관계인 내가 초 근접 조우할 기회. 그것도 로맨틱한 곡선형 아치 발코니가 절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선박 내 숙소에서 말입니다. 또한 갑판 위에서 맞을 일출과 일몰의 장관까지, 그 설렘은 결코 비현실 세계가 아니었어요. 동북아 태평양 망망대해 위에 머물 선상에서의 첫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선박 내 느린 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를 트렁크 안에 고이 접어 넣은 채 경쾌한 마음으로 수속 대기 줄에 섰습니다. 부산여객터미널에서 벌어진 지루한 승선절차를 밟기 전까지만 해도 지녔던 그 생각은 유효했습니다.
빠른 조 순위에 들어있어 별 기다림 없이 일찍 승선할 것으로 기대한 일은 보기 좋게 뒤집혔습니다. 터미널 광장 안에는 다른 조의 줄도 함께 얼키설키 어지럽게 널려 마치 도깨비시장을 방불케 했어요. 가히 2,400명의 참여숫자라 수긍할 부분도 있었으나, 단지 운영 실종에 대한 아쉬움을 던지며 속수무책으로 겪어냈습니다. 종일 서 있는 자세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녀 늙은 몸은 만신창이 되었지요.
겨우 승선해 객실에 들어섰을 때, 다리에 쥐가 나서 몸의 균형을 잃을 뻔 했습니다. 배 안이 워낙 커서 미로 같은 길을 헤쳐 나오느라 진을 또 뺐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죠. 몰아 내친김에 준비된 다른 일을 실행시키는 게 아닙니까. 늦은 저녁식사에 이어서 해상사고 대비연습을 해야 했고 선상에서 지켜야 할 공지사항을 숙지시켰습니다. 이로써 터미널광장에서 오후 5시에 집결해 그날 자정 침대에 눕기까지 첫 승선의 통과 의례를 지독하게 치른 셈입니다.
몇 시간쯤 눈을 부쳤을까 싶던 둘째 날 새벽, 드디어 발코니 문손잡이를 와락 열어젖혔습니다. 기대와 달리 실용적으로 튼튼한 구조로 치우친 모습에 실망과 동시에 얼른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해뜨기 전의 시각, 시커먼 바다가 집어삼킬 듯 한 기세로 달려드는 듯싶어 섬뜩했기 때문입니다. 기상과 동시에 배 속을 채우는 일이 선상에서는 최우선입니다. 선수에 위치한 내 숙소와 달리 선미에 있는 식당을 향해 걷고 또 걷습니다. 나중엔 걷기 운동으로 삼았죠. 숙소로 되돌아오면 하루일과가 꼼꼼히 적힌 선내신문을 구독해야 합니다.
모두 빼곡한 일정이지만 선택은 자유입니다. 느긋한 여행을 자처한 내게 이런 빡센 일정이 도열할 줄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강의가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는 혼자 따로 느긋하게 즐길 공간을 찾으면 되지 않냐 반문도 하겠지요. 갑판 위 공간과 숙소 발코니가 유일한 장소입니다. 다만 세찬 바람에 노출되기 십상이니 잠시 머물 일이 아니면 오래 있기엔 적합한 곳이 아니었어요.
선상프로그램은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며 짜임새 있게 돌아갔습니다. 우리사회에 밀접하고도 민감한 사안을 주제로, 참가자들에게 의식전환의 기회를 무한 제공했을 테니까요. 가족과 동행한 40대 초반의 기혼여성은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혼자 강의실에 나와 재기를 꿈꾸고자 귀 기울이는 모습을 강연장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60대 어느 기혼여성은 늦깎이로 방통대 국어국문학 재학 중이라고 자신을 당당히 소개했습니다. 소설가의 강의 일부를 자신이 배운 것과 비유 인용하며 설명을 첨부하기도 하더군요.
식당가에서 우연히 20대 여대생 여러 명과 합석했습니다. 손주 세대라 혹여 나를 기피하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습니다. 반갑게 나를 대했고 내 얘기에도 경청하는 게 아닌가요. 그들은 다양한 세대가 어울린 이곳에서 들을 것도 많고 배울 점도 많아 참석하길 잘했다며 밝은 표정을 짓는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환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배 위에서 잠시 벗어나게끔 배려한 프로그램이 따로 있습니다. 격일로 배정돼 바깥바람을 쐬어 땅에 발 디딜 기회를 제공한 기항지 투어입니다. <대만 • 오키나와 • 사세보>의 여러 지역을 잇는 내용이었습니다. 선택지 또한 개인의 자유 선택사항일 뿐입니다.
크루즈여행은 편안하고 느릿해서 고령층이 선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의외로 참여 연령대가 10대 이하 어린이부터 90대까지 폭넓어 놀라지 않을 수 없더군요. 80세 이후 고령자의 경우, 보호자 대동이 원칙입니다. 70대 후반의 나는 대동 없이 신청이 가능했습니다만, 선상생활 그곳마저 하루를 챙길 일로 왜 그리 부산하던지요. 그러느라 몸이 고단했고 결국 조용히 즐기려던 계획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두 권의 책을 지니고 갔지만 지속적인 배의 진동과 피로감으로 인해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되더군요. 한 번은 대다수 기항지로 떠나 배 안이 텅 빈 날, 수영장이 있는 9층 중앙 홀에 조용히 머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쉼 없이 돌아가는 대형영상의 소리가 방해돼 포기해야 했습니다. 밤하늘의 별 관찰도 구름이 잔뜩 낀 날씨가 많아 원하는 바 실현되지 못했고, 일출과 일몰 역시 구름 사이로 엿볼 수 있는 정도에 그쳐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한동안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잠에 취해 지냈는지 모릅니다. 피곤이 범인임을 완벽하게 시인한 셈이죠. 게다가 소화기 장애까지 몰고 왔는데 피곤이 쌓여 위 기능저하를 부추긴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평소 위염발병을 대비해 비축해 둔 비상약이 있었는데, 이를 복용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번졌고요. 설상가상으로 입맛까지 없어진 점은 처음 겪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위 모든 증상이 만 5일이 지난 설날부터 진정이 되었고, 이 글도 쓸 수 있게 된 겁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을 즐겨온 편이지만 이번 만큼은 무리였음을 자인합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크루즈여행은 체력이 받쳐줄 70대 초반까지 참여 가능한 매력적인 여행이라 생각합니다. 떨어질 체력이 걱정된다면 보완해 줄 이가 곁에 있도록 가능하면 어울릴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것이 좋을 테고요. 무엇보다 배에서 새롭게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가 자신의 삶을 확장시킬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이 크루즈여행의 장점으로 부각되지 않겠어요.
이번 여행에서 하늘과 바다가 일직선으로 맞닿은 망망대해를 360도를 돌고 돌아 원 없이 바라봤다는 점은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일게 하더군요. 깊은 바다 위에서 사고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도착했다는 감사함까지 그에 얹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