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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Oct 03. 2023

추석연휴 끝자락에 배달된 특별한 선물

  이른 아침, 집 가까운 산을 올랐다. 슬그머니 찬 기운이 내리며 내 몸을 휩싸고 돈다.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태풍을 온전히 맞으며, 곤충들에게 먹히기도 했지만 이파리들은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가을 옷으로 갈아입으려 태세를 취하려는 듯 충충한 색을 띤 나뭇잎도 드문드문 달려 있다. 집에 도착해 만보기를 보니 7천 걸음을 훌쩍 넘겼다. 걸으며 건져 올린 사유가 ‘가족’없이도 지낼 수 있는 명절을 최적화시키더니 그 언저리의 생각마저 깔끔히 정리해 주었다. 그런 오늘이 올 추석연휴의 끄트머리라니 참 빠르게 지난다. 


  추석 당일 두둥실 떠오른 슈퍼문을 양손에 양껏 담았다. 구름이 잔뜩 드리운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낸 혁혁한 달빛이었다. 늦은 밤 일부러 달마중하러 인근 공원에 나가 홀로 맞이한 보름달이 이 얼마만인가. 보름달로 말할 것 같으면 예전 머물러 살았던 전원의 향수에 젖게 한다. 짙게 깔린 어둠의 무대에 두둥실 오른 달맞이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잊지 못할 감흥으로 남아있으니까. 압도적인 기세로 떠있는 성성하고도 장엄했던 달님... 도심 속 달빛이 그때의 속도와 질량처럼 내 가슴에 와 닿을 수 있으랴. 뒤돌아 나오려는 길목에서 밀려오는 인파를 마주하며 명절을 실감케 했다. 명절 때마다 살피는 일이지만 주구장창 먹을거리를 장만해놔야 하는 일이 6일로 늘어난 것 외엔, 혼자인 내게 딱히 다를 바 없는 내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다만 명절 내내 상점이 닫힌 일로 배를 대충 채우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 밥상의 당위성이랄까. 이런 때 일수록 제대로 차려먹기로 한 일이다. 


  나이 들고 비혼인 내게 명절연휴는 별다른 분위기를 고조시키지 못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거리의 가족단위 행렬을 뭉개고 선뜻 나설 마음이 도통 일지 않았다. 되도록 집 안에 틀어박혀 연휴가 얼른 지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와락 바뀐 건 ‘홀로의 시간’이 오랜 간 뿌리를 내리고 내성이 생기면서 의식의 환기를 불러일으킨 까닭이다. 그리고 명절 날 실제 거리를 다녀보면 혼자 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외려 적지 않음을 알게 된 후로 지레 짐작했던 지난날의 판단이 무색해졌다. 그 이후로는 사찰에서의 합동차례에 참여하고 산을 오르고 가까운 공원을 거닐거나 보고 싶은 영화 관람 등 일정을 스스럼없이 해냈다. 자유자재의 선택이 명절을 소화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처럼.


  게다가 가고픈 지역을 밟아가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 이 가을이 아닌가. 이런 축복의 날들이 내 곁에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즉각 실천에 옮긴다.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노무현대통령의 사저, 봉하마을을 망설임 없이 2박 3일간 다녀왔다. 비혼 이라 자식을 밴 적 없지만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 여럿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비혼 여성들이 적극 참여방식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시민단체가 그 중 한 곳인데 이 가을에 초청을 받아 다녀오게 된 것이다. 화면으로만 대해왔던 그 곳을 둘러본 내 감성은 예상을 뛰어넘어 남다른 색감으로 다가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이 의외로 소박해서 놀라고 퇴임 후 이 집에 머무셨던 날이 1년 3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임에 새삼 두 번 놀랐다. 전원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웬만한 저택의 규모와 맞먹을 듯싶다. 이런 곳을 한때 아방궁 운운하며 야유 세례를 퍼부었다니, 무도했던 그들을 향해 꾸짖을 가치조차 있을까 싶다. 봉하마을 전면에 익어가는 벼이삭을 모자이크로 새긴 ‘역사는 진화한다.’란 글귀가 지금도 선연하게 느껴진다. 이 같이 내가 품은 ’또 다른 개념의 가족’들이 잘 자라서 희망의 사회적 대안으로 자리 잡아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가족’이란 개념을 들먹인다면, 고정된 혈육을 넘어선 연결된 시민단체와 작지만 제대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언론기관에서 그 의미를 찾고자 했다. 가족이란 틀 안에 자신을 가두려하고, 자신의 존립을 확인하려 들고, 인정받는데 안주한다면 과연 탈력을 받는 사회구성원의 배출이 요원해지지 않을까. 오로지 혈연중심의 성공과 관심에 매몰된 작금의 현실, 그들만의 가족응집력은 21세기 건전한 사회를 이루는데 장애요소가 될 뿐이다. 나는 그 삐뚤어진 가족상을 과감하게 벗어 내친지 오래다. 흔히 거론되던 기성세대의 기득권마저 내려 놓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내가 당당하고 건강한 노년을 구가하지 않나 싶다.  

  싹을 틔워 알뜰살뜰 보듬고 관심을 쏟아내 자식처럼 보듬게 된 여러 시민단체. 추석을 앞뒤로 날아온 행사 기록으로 탁상 달력은 빼곡하게 차있다. 그들로부터 과분한 초대와 관심을 받아 내 노년의 삶은 덤으로 화려해졌다. 얼마 되지 않은 물질적 후원 뒤에 누리게 된 혜택은 무궁무진하다. 그들과 엮인 사회적 연대의 끈으로 내 노후의 삶이 든든하다 못해 행복의 질 또한 높여주고 있다. 당차게 내게 들어선 이 같은 질감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 명절 연휴, 이 아니 좋은 선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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