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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Nov 12. 2023

방전되지 않을 배터리

  오랜만에 헬스장을 다녀올 만해서 안도했습니다. 안심하기엔 이르나 6주 만에 호전돼 가는 몸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간의 상황이 오락가락했으니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거죠. 환절기 널뛰기 기온 차이로 방안에서조차 이를 적응하지 못하는 늙어가는 몸인 것을요. 작년과는 사뭇 다른 기울기라서 잠시 혼란스러웠죠. 체질이 바뀌어가는 듯해요. 이렇게 한 해 한 해 내리막길 몸을 받아들이는 건 담담한 죽음에 이를 예행 연습이 될지요. 이로써 10월 이후의 예약된 일정은 모두 취소된 반면 병원문턱은 수시로 밟게 됐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활동하기에 괜찮은 나이, 70대가 아닌가요. 실은 봄부터 계획된 일이 왠지 무난하게 잘 이어지는가 싶었죠. 하필이면 만물이 화려한 색조로 물들어가는 가을날, 발목이 잡힐 줄이야. 치솟는 우울 감을 감출 길 없었고 속수무책 밀려온 무기력증은 덤으로 작용했습니다. 그에 따른 루틴의 차질도 불가피했고요. 


  그간 이어왔던 한 달에 두 권의 책 읽기 연장에 실패했습니다. 개운치 않은 몸의 증상은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자리에 자꾸 눕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으니까요. 덩달아 계획했던 가을여행도 수포가 될 수밖에요. 지난 봄 더 나이 들기 전에 틈틈이 여행을 다녀오자 다짐했습니다. 여행이 귀찮아질 나이에 접어든 선배들의 경우가 곧 내 차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키운 까닭입니다. 젊어서는 눈 호강 중심의 장소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런 감각적인 즐거움은 일회성에 지나지 않아 내 삶 전반에 끼치는 영향이 초라하더군요. 한 순간 일어난 감흥이 얼마 후 사라지는 소모적 여흥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몇 해 전 아예 그 방향을 바꾸었죠. 죽기 전, 내게 의미를 부여한 곳을 손꼽기로 말입니다. 혼자 떠나 홀로 걷는 심심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꽉 찬 여정입니다. 여행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러 날의 시간을 할애해 여행을 준비하느라 흐트러질 루틴을 안배하고 재배치합니다. 집 비울 일로 발생할 집안 구석구석 손보는 일. 돌보는 식물들과 길고양이를 돌봐줄 대리 캣맘을 구하는 일조차. 여행 체류하는 날 만큼 공들여야 하는 나날들이 곱이 될 정도로 준비했었는데... 바로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 벌교문학관 탐방과 제주도 ‘오름’중심의 여정을 잡았던 겁니다. 모두 공수표가 되었지 뭡니까. 


  올봄 들어 부쩍 여행을 추진해왔고 무난히 넘겨 가을까지 끄떡없으리란 기대는 이 늙은이에게 과욕일줄 몰랐습니다. 지리산 생명평화기행과 경주 남산 석불의 미소와 대면하기까지 몸에 무리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이후 김해 봉하마을을 다녀와 피곤이 밀려왔을 뿐입니다. 비용도 아끼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느긋하게 걸으며 길에서 보내는 시간여행을 고수한 것이 무리였나 봅니다. 무한정 걸으며 마주친 얼굴들과의 눈인사, 풀 한 포기, 뺨에 스치는 바람과 풍경들이 되살아난 듯합니다. 침묵과 동행할 때의 느낌들이 세포에 녹아드는 순간이었죠. 차량 밖 빠른 흐름에는 닿을 수 없는 길 위의 이야기가 확장되며 흠뻑 젖게 됩니다. 그러느라 노구임을 깜박했습니다. 그 뿐인가요. 이동 중 여행 짐은 어깨에 지고 손에 또 한 짐 들린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느라 오르락내리락 했던 몸이 고됐던 것도 추가되었죠.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짐만이라도 누군가 들어주는 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이 같은 여행이 언제까지 지속가능할까 다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이로써 마감되었으나 내년 봄 여행계획을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몸을 달래가며 차후의 여로를 열어볼 요량이거든요.


  낙심했지만 위안삼은 일이 이를 무마시켜 주었어요. 바로 글 쓰는 분량을 꾸준히 채워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루를 지탱해주는 힘은 그날그날의 계획된 일과를 미루지 않고 해내는데 있다고요.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만큼 생생하고도 확실한 삶의 현장이 또 있을까요. 폼 나는 자리를 좇느라 소진시키고 애먼 자신이 되기보다 소박하지만 실행가능한 일에 자신의 족적을 밟아 충만해지는 자신으로 가꿔가는 일로 말입니다.

  지난 봄, 지리산 구례와 섬진강 주변 여순항쟁의 역사현장은 가히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면으로만 알다가 실제 담긴 생생한 모습을 대하니 확연히 다른 감정이 솟구치더군요.  잘못된 역사인식이 얼마나 무모한 생명들을 주검으로 내몰았는지 전율을 느끼게 한 기행이었으니까요. ‘역사적 사실은 팩트가 아니며 사실(事實)은 사실(史實)이어야 한다.’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죠. 이어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역사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의해 자신이 머문 시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역사관의 아이러니까지.  


  또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저는 글을 마무리하느라 끙끙대는 중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몰입의 순간들은 제 내면이 단단해지도록 지원사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 반복적으로 몸에 붙인 좋은 습관들이 자리매김한다면 불량스럽고 잡다한 일들이 끼어들 틈이 생겨나지 않겠지요. 단지 죽는다는 것과 늙어가는 것이 함수적 관계이듯, 점점 떨어져가는 제 몸의 건강도, 회귀로 잉태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으로 옮겨가는 자연현상일 뿐. 어쩌겠습니까. 오지 않은 미래에 사로잡히지 말고 ‘괜찮은 지금’, 정해진 일에서 손 놓지 않는 일 외에 나서야 할 일이 따로 있을까요. 정신만큼은 이 같은 리듬을 유지한 방전되지 않을 배터리로 장착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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