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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an 14. 2024

소란함 끝의 단상

  이런 이런 프린터에서 잉크가 찍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새 것으로 교체했는데 무슨 연유일까. 익숙하게 사용하던 기기가 원래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머리부터 지끈거렸다. 할머니이지만 아직은 컴퓨터를 다루는데 별 무리가 없고 웬만한 상품은 인터넷 시장에서 구매한다, 그런데 인터넷 주변 환경이 나날이 진화하고 젊은이들 위주로 바뀌어가는 일이 많아 난감하다. 젊은이와 달리 대응력과 민첩함이 떨어진 노년에 쫒아가느라 쌓여가는 이 피로감을 어찌하랴. 언제까지 나 홀로 이 변화무쌍한 일 처리에 나설 수 있을까. 이젠 적당한 시기가 오면 손 내려놓을 용기를 품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끝이 없어 보이는 인터넷 학습으로 바닥 날 체력은 빤하고 머지않아 가볍게 떠나려는 내게 방해 요소만 될 테니까.  


  새해 벽두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15년간 사용해온 기기에 이상 기류가 흐른 것이다. 물건도 오래 끼고 사용하다보면 생물처럼 정이 들지 않나. 아직 기능이 멀쩡한데 단지 교체할 소모품이 없다고 해서 바로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겠는가. 이를 감행하려 든다면 내면에서 갈등이 요동을 칠 일이다. 단종제품이라서 잉크 제작을 멈춘 지 오래라고 했다. 2023년 초에 구입한 잉크 포장지를 뒤늦게 살펴보았다. ‘2021. 02’란 표시가 또렷하게 다가왔다. 만들어낸 지 3년이 다 된 내용물이 굳은 것으로 어림짐작했다. 아직 쓸 만한 이 기기를 포기할 수 없어 살려내고자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 부었다. 


  프린터에 긴급수혈하고자 검정 잉크의 재고여부를 각방으로 수소문했다. 마침 서비스센터와 인터넷상가에서 각각 하나씩 구입하였고, 방문할 기사의 손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가슴을 졸이는데 기사는 빠진 컬러잉크 자리를 가리키며 검정 잉크와 함께 꽂혀 있어야 작동된다는 점을 말하는 게 아닌가. 아뿔싸, 내 딴에는 사용하지 않아 오래 꽂혀있던 컬러잉크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틀 전 그것을 제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때마침 재활용쓰레기 수거일과 기사 방문일이 겹쳐있음에 우선 안도했다. 지체하지 않고 단발에 튀어나가 부랴부랴 쓰레기전용 양곡부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엄청 추웠던 날, 저녁이었다. 2m에 상응한 높이의 부대 속에는 이미 플라스틱 쓰레기가 반 이상 채워져 있었다. 뒤엎어 다시 원위치로 되돌려 놓을 태세로 고생한 끝에 그 쪼그만 폐 잉크카트리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고 안도감도 잠시, 막판에 건 기대마저 수포가 될 줄이야. 재구입한 잉크 역시 먹통이었다. 밀려오는 실망감을 추스르며 새 프린터기기를 주문하고 있는 내 처진 어깨너머로 기사는 신상품도 5년 정도 사용연한에 그칠 거란 말을 흘렸다. 자본주의 경제 하의 이익창출은 이처럼 짧은 수명의 제품양산으로 소비자들을 능멸하려 든다. 그럴싸하게 홍보된 최신 제품에 눈이 돌아가게끔 유도하는 기업 영업방식을 어찌해야 하나. 오직 전자제품 뿐이랴. 얼마 입지 않았는데 싫증이 나서 쉽게 버려지는, 값싼 가격의 직조된 옷들이 거리마다 넘쳐난다. 우린 이렇게 지구 공공재를 함부로 남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예전 전기제품은 가용기간이 길었고, 고장이 나더라도 수리해서 고쳐 써왔다. 10년 사용은 예사였고 지금 소지한 전기다리미도 40년을 넘겼으나 고장 없이 잘 쓰고 있다. 반면 요즘 전자제품은 출시와 동시에 사용연한이 매겨져 나오고 있다. 평상 5년에서 7년을 주기로 신제품을 구입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과 새 물건에 공들일 마음이 옅어짐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은 짐작하기조차 어려우리라. 변화 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노년층에게 새 기능이 장착된 전자제품일수록, 짧아진 사용연한으로 파생되는 낯섦이, 두통을 유발시킨다. 게다가 향후 상거래는 인터넷망 확대일로로 치달을 테니, 문제해결 능력을 잃을 날도 멀지않음을 각오해야하지 않겠나. 단단한 마음태세로 임해 뒤따르는 노년을 대비한다면 그 충격은 한결 완화될 것이리라.


  엉뚱하겠지만 그 대안으로 반란을 일으켜볼까 생각중이다. 몇 해 전 나는 80세에 소속된 각종 모임에서 홀가분해지는 ‘이별식’을 갖겠노라 다짐했다. 번잡한 사회 언저리에서 완전 벗어나 온전한 내 삶 속으로 되들아 가려는 나만의 시도다. 지금 걸맞은 맞춤 생활로 진입한 내게도 불필요한 요소를 말끔히 떼어 내지 못한 미진함이 있다. 내게 머물 생산적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서. 걸리적거리는 부분을 과감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더 깊어진 배후다. 인터넷을 통한 교류에서 멀어질 일과 인간관계 축소에는 고립될 두려움이 깃든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관계의 대부분이 생애 액세서리로 그친 일이 많았음을. 신변 장식물도 젊은 날의 한시절일 뿐, 차오르는 내면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스스로가 발광체임을 확인할 날도 분명 만나리라. 그러니 어설픈 두려움일랑 망설임 없이 내동댕이쳐라. 오히려 목마르게 하는 샘에 쏟아 붓는 일에 그대가 열중할 일이 아닐까.


  첫 시도로서 사용 중인 스마트폰을 폴더로 바꿀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를 클릭하며 아까운 시간들이 도둑을 맞는다. 그 뿐인가. 확인할 필요성이 1도 없는 쓰레기 같은 소식의 오염은 정신을 황폐시킬 뿐이다. 그러기에 남겨진 내 시간은 정선된 정보와 참 교류만으로 채우고 싶다. 남들과 거꾸로 가려는 시도이며 불편을 안기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그 길은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 자연을 닮은 삶이다. 그런 곳에서 같은 결을 지닌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이루며 진짜 사람답게 살고픈 간절한 염원이 담겼다. 정월 대보름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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