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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Feb 29. 2024

기억퇴행 이면에서의 득템

  요즘 들어 손 안에 자주 쥐여지는 책이 있습니다. 서점가를 강타한 일본 실버 센류 걸작선, ⌜사랑인줄 알았는데 부정맥⌟. 유머 감각이 젬병인 나는 이 책을 통과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웃음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일본 노인들의 해학과 익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생성해 내는 겁니다. 기억력 퇴행의 실체를 대변해주듯 그들만의 언어는 ‘유쾌 상쾌 통쾌’한 특별한 세계로 독자층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즐거움에 마냥 머물 수 없는 민망함도 동반되더군요. 웃음 너머로 꽤나 묵직한 동병상련의 양감이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게 아닌가요. 그야말로 웃픈 현실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워지는 듯 했습니다. 그것에 걸친 내 증상이 비록 초입단계라 여길지라도, 언젠가는 슬그미 다가와 이지러질 기억의 파편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름이 생각 안 나 / ⌜이거⌟ ⌜저거⌟ ⌜그거⌟로 / 볼 일 다 본다⟫ ⟪이것도 소중해 / 저것도 소중해 / 그러다 쓰레기방⟫ ⟪일어섰다가 / 용건을 까먹어서 / 다시 앉는다⟫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방’을 가꿀 정도의 급발진은 아니지만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할 때마다 훗날 쓸모 있게 쓰일 물건들을 남겨놓는 때가 내게도 있습니다. 실제 그런 물건을 요긴하게 사용한 경우도 있거든요. 어느 날, 압구정 요지에 거주하는 한 지인의 하소연을 듣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파트에 버려진 쓰레기를 집어와 자꾸 집안에 쌓아놓는다며 괴로운 표정을 짓더군요. 지나친 현상이긴 하지만 1960년대 궁핍하게 지냈던 시절의 경험이 뇌리에 각인돼 있어 잘 사는 이후에도 버려진 물건들에 대한 집착을 불러오게 한 거죠. 부유한 동네에서 멀쩡한 물건들을 내다 버리는 그 지역의 풍토도 한 몫을 했습니다. 


  기억력 감퇴는 노화 그리고 스트레스 • 건강문제 • 수면부족에서 온다고 했던가요. 그러니 늙어가는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만은 아니겠지요. 노화의 진행은 젊거나 늙음을 떠나  개인이 처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복잡한 현대에서 포화상태인 기억들은 자연스레 용도 폐기되고 있지 않나요. 대부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 담는 뇌의 기능은 이미 보편화된 상식으로 통합니다. 그러면서 우린 지척의 환경을 메마른 풍토로 갈아치우면서까지 쓰레기 같은 기억들을 양산해내며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면서 문득 이와 같은 기억력의 퇴행이 되레 반길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숨결이 바람 되는 날, 가벼운 몸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포화 상태에 이른 기억의 창고를 하나 둘씩 비어낼 연습이 지금 필요한 일이라고. 그런 ‘텅빔’의 건강한 욕구는 머지않아 떠나는 이에게 축복된 죽음을 이끌기에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단순명료한 삶을 살다가 훌훌 털고 저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니 쇠잔해갈 내 기억의 퇴행을 굳이 측은히 여기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실천하는 일이 있습니다. 죽음을 대비해서 연말마다 지닌 물건들을 정리하는 겁니다. 주로 애장품이죠. 아끼는 것이지만 몸에 걸치고 외출할만한 행사가 줄어든 노년인 탓에 한 해 두어 번 입어 봤을 옷가지들. 의미 담긴 물품이라서 서랍 속에 처박혀 바깥세상과 차단돼 생명을 잃게 한 그릇들. 그 외에 값나가는 카메라와 그림액자 등등. 쓰임새의 종말을 고한 과거 쓰레기의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되돌리려는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꽤 있을 듯합니다. 해마다 줄이고 줄이고도 훗날 남겨질 유품은 나오기 마련이겠죠. 끝없이 이어질 용도 폐기될 물건들의 뒷감당을 어찌하나요. 특히 홀로 사는 사람들에게 반길 소식이 있습니다. 전문 유품정리사에게 의뢰하도록 사전 유언장에 적시하고 비용을 남겨두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미니멀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쓰레기를 지구에게 덜 남기는 미덕이 되겠지요. 문제는 미처 준비되지 않았는데 들이닥친 죽음 이후의 유품들은 대책 없이 대형 쓰레기를 양산해 추락사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기억 퇴행의 만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그나마 판단력이 살아있을 때, ‘쓰레기산’을 이룬 공헌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구명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인 겁니다. 죽음준비는 이처럼 전 생애를 거쳐 장대하나 세심한 과정의 연속일 것입니다.  


  떨어져가는 기억력이 물리적 시간대를 따라 진행되는 게 아닌 만큼 여유를 챙기게 된 지금입니다, 이젠 세상사 깊은 부분에까지 관여치 않고 그때그때를 살아내야겠다는 새 마음을 냈습니다. 서늘한 머리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객관화된 사물을 바라볼 나날이 길게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즐거웠던 기억도 일순간 머문 과거 즐거움의 재현일 뿐이며, 고통의 기억 또한 찰나 지나간 과거의 복제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은 더 큰 세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눈앞에서 벌어진 단편 현상에만 매달려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 좋은 기억과 나빴던 기억으로 나눠 집착할 일이 아니라고요. 자 이제 차근차근 저 큰 세상을 향해 발돋움하려는 연습에 나서렵니다. 그 길이야말로 내 죽음의 질을 높일 유일한 방책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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