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오이, 호박을 냉큼 샀습니다. 전통시장 가판 위에 제일 먼저 눈길이 꽂혔습니다. 작년 늦가을부터 오름세였지만 숨 고르면 예전 가격대로 회귀할 줄 알았지요. 막바지까지 구매를 보류했던 그 야채였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기다려도 상향곡선이 꺾이지 않자 작심하고 재래시장에 들려 구매하고 말았죠. 이 얼마 만에 너희들을 맛보는 것이냐. 단지 오른 가격대란 이유로 구입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마음이 꿈적하지 않았던 겁니다. 뭔가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굴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요. 이렇게 서민들의 먹을거리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먼 위치에 있는 ‘경동시장’을 원정 방문한 것은 임계점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가까운 재래시장을 제치고 애써 발품을 팔아 찾아간 그 곳은 저렴한 가격대란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요. 장바구니에 나물 위주의 봄을 한아름 담아왔습니다. 이 처럼 요즘 물가의 오름세는 소박한 나의 밥상에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지요. 채식위주의 내 생활인데 그마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자못 신경이 쓰이는 요즘입니다. 초라해진 밥상 모서리에 부쩍 쪼그라져 붙어버린 껌딱지 같은 마음이 되었지 뭡니까.
그런데요 이런 내 상황과 비길 바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취 청년들의 시름을 대하고 만 것이죠. 자취생들 대부분이 최저임금에 준하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생활비로 충당하는데, 고물가시대에 끼니를 때우는 일이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1만 원대 국밥을 포장구매해서 하루 두 끼로 해결한다는 것이지요. 아끼고 아끼다 최종 끼니를 과자, 우유, 커피 같은 간식꺼리로 때우기도 하고요. 모 젊은이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 블로그에서 체험단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음식 맛을 글로써 홍보한 대가로 식당에서 무료 급식을 받는다는 것이죠(이로써 맛집 검색에서 올라온 찬사의 글이 모두 진실이 아닐 거란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유통기간이 넘은 식자재를 싸게 파는 ‘임박몰’을 이용하기도 한답니다. 나도 일부러 저녁 무렵 마트에 들려 한구석에 진열된 유효기간이 지난 품목을 싼 가격으로 구입하곤 했습니다. 이제 자취하고 있는 젊은이들 밥상이 위태로워졌습니다. 한참 잘 먹어야 할 시기에 고른 영양섭취는커녕 허접한 밥상으로 건강을 해칠 염려가 커졌습니다. 이 문제가 단지 청년들에게 국한될 일일까요. 사회 취약계층이나 서민들의 식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우려되는 부분이겠지요.
20여 년 전 양평 전원생활 시절, 경작물을 떠올렸습니다. 가꾼 텃밭에서는 아침마다 주렁주렁 달린 가지며 오이, 호박 등 먹을거리가 홍수를 이뤘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결실을 맺었죠. 정말 잘 자라는 품목이라서 지금처럼 귀한 몸이 될 줄 모르고 무심하게 툭툭 취급해버린 작물이었습니다. 혼자 소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귀경길에서 지인들에게 마구 나눠줬던 일도 있었지요. 그랬던 저 야채가 무슨 조화 속에서인지 격상된 가격대로 탈바꿈하였을까요. 우선 기후변화로 인한 먹을거리 위기를 짚고 가야겠죠. 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농부들도 몸으로 그 위기를 체감한다고 합니다. 작물들의 생육기간이 짧아졌거나 새로운 해충들의 출현 그리고 느닷없는 폭염과 폭우로 작물수확이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 대비해 정부는 미리미리 대처해야 하는 것이죠. 같은 지구촌 상황 아래서 유독 우리나라 물가가 세계 톱에 올랐다는 불명예는 되짚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한편 수요와 공급 측면을 조정하는 물가정책의 실책과 실효성 있는 유통과정의 대안 부재가 그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대파 논쟁’이 수그러지지 않고 있는데요. 정부는 ‘대파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 관세 없는 수입으로 전환했습니다. 한편 그 같은 결정의 이면에는 우리 농부들의 눈물을 외면할 일이 동반됨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사람들 정체성의 시발점은 ‘밥상’입니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매일 마주하는 밥상인 것이지요. 건강한 정신과 육체는 ‘밥심’에서 나온다고 했고요. 옛 사람들은 밥알 한 톨 한 톨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마음의 근간을 말하려는 겁니다. 내 마음껏 소비하듯 음식을 대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이 소중한 만큼 섭생 대상의 생명마저 배려했습니다. 자연과 생명윤리사상인 것이죠. 그런 요즘 간편 즉석요리를 즐겨 먹고요, 1회용 또는 가공식품들이 넘쳐나지 않나요. 좋지 않은 환경과 인공 양육방식으로 나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제대로 된 자신을 지켜갈 수 있을까요. 귀한 정신의 소유자, 그 밑바탕에는 건전한 밥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끼니 걱정에 무방비상태인 자취 청년들의 사각지대가 눈에 밟힙니다. 끼니 걱정 없이 잘 먹으며 미래 준비에만 집중해야 하는 젊은 층이 아닌가요. 그들의 길을 응원할 사회적 책임이 정부 다음으로 우리들에게도 있고요. 이 늙은이는 바우처와 같은 지원방식을 기웃거려 봅니다. 한시적으로나마 젊은이들의 끼니 걱정을 해방시켜주는 좋은 정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자세가 우선일테죠.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는 사회움직임도 있기를 바라고요. 다만 낙인과 같은 일로 이어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의 자존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확고부동한 자리이니까요.
이런 현실과 아랑곳하지 않은 봄의 전령사, 그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고운 색으로 단장하느라 여념이 없네요. 세상 아무 일 없는 척하고 있는 모습인 거죠. 피워내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끼니 걱정을 내려놓고 잠시라도 화창한 봄날을 만끽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