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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un 27. 2024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의 현장에서

  불안한 마음상태에서 말의 실수가 생깁니다. 누구든 그 감정에 잠길 수 있으나 벗어나지 못한다면 발생하는 주변의 일과 엇박자를 낼 수 있겠죠. 상황을 실제와 다르게 해석하는 무의식 속의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그 안에 가두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화를 풀만한 먹잇감을 찾기 시작하죠. 분풀이 대상을 만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의 가해자로 돌변해 상대에게 일방적인 몰매를 가격합니다. 화풀이의 대상으로 연고 없는 불특정 시민에게 일력을 가한 특정인의 뉴스를 우린 종종 접하지 않나요. 그런데요 뭇매를 가하는 일 못지않게 언어의 폭력 또한 ‘황당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일을 얼마 전에 겪었습니다. 괴이한 특정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주1회 인문학 강좌 봄 학기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60대 중반인 그녀와의 처음자리에서 남자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며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거침없고 투박한 어투에다 갖춰 입은 옷차림에서 어렴풋이 그 느낌이 풍겨져 왔습니다. 마침 그녀와는 같은 구역에 살고 있어 수업을 마치고 두어 번 귀가 동행을 했습니다. 그런 중에 그녀가 경기 지역신문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올린 경력과 꾸준한 독서활동에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아직 서로의 관계가 어설펐을  무렵 대뜸 방과 후 매번 모임을 갖자고 제안하더군요. 요즘 자신의 글감이 떨어져 고민 중이라 했고, 차담을 통해서 그걸 건지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비쳐졌던 겁니다. 그녀의 특유한 어투에 미뤄 보면 자기 주도적 초스피드로 밀어붙이기식의 태도를 보였어요. 부담스러웠고 매주의 만남은 어렵다며 거절했죠. 나의 거절로 무안했을 그녀가 마음에 걸리더군요. 봄 학기가 한 달여 지날 무렵 몇몇 회원들과의 한 달에 한 번의 모임을 나서서 주선했습니다. 50대와 60대 그리고 70대인 나를 포함한 5명의 시작은 쾌조를 보였지요.


  사건의 발단은 세 번째 달 모임 추진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정해진 그 날과 공교롭게 겹친 한 회원의 출판기념회가 4시로 급하게 잡힌 겁니다. 다행이 같은 건물 내 음식점에서 갖는 행사라서 이동선의 절약을 꾀할 수 있으니 모임추진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미뤄 생각해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우리 수업은 3시에 마치는데 한 시간의 자투리 시간이라도 쓸데없이 소비하느니 예정대로 차담을 이어가자고 독려했지요. 모두 응하겠다는 답을 줘서 안심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강좌 지도교수의 스케줄 조정이 있어 행사 시간이 몇 번 들쑥날쑥했습니다. 잠시 헷갈린 부분에 잠식됐지만 교수는 4시의 행사로서 최종 고지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변동사항이 오락가락 하던 중에 일어난 그녀의 돌발적 언행(독재적 진행이다 / 의무감 있는 모임은 싫다 /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단톡방에서 나가겠다)이 튀어나온 거죠. 그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 상대와 치고 박은 일이 실제 상존했던 것인 양 엮인 소설 한 편의 독백과도 같은 것이었죠. 필설로 다하지 못할 만큼 여과되지 않은 그녀의 거친 돌출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 참담했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그녀를 둘러싼 당시 심리적 배경에 생각이 미치자,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들게 하더군요. 앞뒤 사정을 찬찬히 살피면 그 같은 언행이 나올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녀가 창조한 언행의 배경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쏘아올린 그녀의 화살 과녁이 나를 의도했든 아니든, 괴로움에 잠길 일에 나 자신이 넘어가지 않았으니 그로써 무대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지요. 그러면서 집히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기 바로 두 주 전, 그녀의 얼굴이 꽤 어두웠는데 자신이 요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내게 저지른 뚝뚝한 태도에 대해 해명을 하더군요. 그때부터 이미 조짐이 일어났던 겁니다. 그리고 해당 모임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집 싱크대에 문제가 생겨 아랫집에 물이 새 공사를 해야 하니 나올 수 없다는 전갈도 있었죠. 그런 그녀의 글 속에는 짜증이 묻어 나왔습니다.

  자신에게 쏠린 부정적 감정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본성을 되찾거나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성으로 되돌리는 일이 각자 지은 습(習)과 업식(業識)에 따라 멀 수도 가까울 수도 있겠죠. 이렇듯 생각과 감정은 뇌의 상호작용으로 소통되는 이중 악기와 비유됩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어디 한 곳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판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보십시오. 당시에는 심각했던 일이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별 게 아닌 것으로 전락되는지를.


  나는 이번 일을 통해 그녀를 가벼운 존재로서 치부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은 펄럭이던 옷자락에 불과했으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안온한 모습을 알아갈 기회가 절개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어쩌면 지금쯤 그녀가 홀로 북 치고 장구 친 일을 후회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나 자신도 역량이 부족해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한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어요. 이것이 나이 든 사람으로서의 상대에게 지녀야 할 마음도량이며, 이를 통해 수행의 깊이를 더할 기회로 삼으렵니다. 나 자신을 비루하고 낡아빠진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이 배가될수록 나의 지향하는 노년의 터전도 더 튼튼해지지 않겠어요. 오늘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배움터에서 한 수 얻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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