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꾸린 여성들로부터 간혹 듣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사시는 게 부러워요.” 가족들로 인해 파생된 골육의 시간들이 여성들에게 편중되었다는 말은 과한 지적일까요. 그 흔적을 더듬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옛 어머니들의 삶을 관통한 설움의 세월이 그 얼마며, 여성의 사회지위가 향상된 요즘이지만 지금 현장 몇 곳은 그때와 별반 다름없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맞아야 할 숙명적 굴레. 세상이 여러 번 바뀌어 여성들의 잔손을 해방시켜준 편리한 기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만, 대체 불가한 여성본연의 자리가 엄연하게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무한책임의 모성애를 요구받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살림살이의 공전은 또 어떻습니까. 그리고 예기치 않은 일로 번지는 시가와의 갈등 해소욕구가 마구 분출되지만. 감당할 깜냥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부딪치게 될 무력감은 증폭되어 어지러운 현실을 맞기도 하죠. 그렇게 시달릴 가족 없이 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영혼의 자유가 부럽다는 뜻이겠지요.
부러움의 대상이라 해서 들뜰 일일까요. 아니 그럴 상황도 아닌 것이... 우리 삶의 여정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기혼과 비혼 서로에게 대상화되지 않고 객체적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 어느 입지에서든 도드라져 빛나는 점은 자체발광에서 유인되었기보다 고양된 자의 정신적 소산일 테니까요. 그러니 보이는 면만 인식해서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겠지요. 기혼자는 사람 수 만큼 ‘가족 보험’을 들었다 생각해 훗날 안길 보상과 손실을 받아들이면 그만일 것이고. 상대적으로 비혼인 자는 협력자 없이 맨땅에서 홀로 가꾼 완주의 힘을 키우듯, 기혼과 비혼 양쪽의 온도 차이만 주어질 뿐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입지를 무턱대고 부러워할 일도 아니고, 어느 상황에서든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의미 있게 채우면 그만이지 않겠어요.
얼마 전, 건축박람회를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그 장에서 혁신기술과 매치된 디자인 물품을 보고 눈에 지진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최신동향에 힘입어 고령의 나이에 필요한 생활 보조전시품을 접한 일은 그리 반가울 수 없더라고요. 나이든 사람들이 집 안에서 그것도 화장실 내에서 골절 당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젊은이와 달리 하체근육의 부실악화로 발을 헛딛는 것이죠. 오래전 화장실 바닥에 미끄럼방지 패드를 깔긴 했습니다만. 얼마 전인가 욕조를 넘나들 때 하체의 놀림이 예전과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연함에 제동이 걸렸죠. 부쩍 마음이 쓰였고 아직 쓸 만한 몸을 이끌고 전시장을 부리나케 돌아봤던 겁니다. 무한대의 책임이 따르는 홀로의 삶은 현실의 약체를 딛고서라도 살아갈 대비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따릅니다.
30여 년 간 몸을 의탁해왔던 침대가 삐걱 소리를 냈습니다. 게다가 잘 나오던 브라운관 TV마저 치직 소리와 함께 깜깜한 화면으로 바뀐 일은 간발의 차로 발생했지요. 모두 사용기한이 넘어 생명을 다한 정든 물건들입니다. 인터넷서핑으로 새 것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눈으로 확인할 점이 따로 있어 실물시장을 손수 돌아봤습니다. 노년에 걸맞은 물품인지 찬찬히 살펴볼 나이에 이른 게 된 것이죠(인구 5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이라는데 노인전용 품목개발은 왜 이리 더디단 말인가). 매트리스의 두께가 나날이 두터워지는 요즘. 향후 겪게 될지 모를 낙상을 대비해 침대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폭은 종전 보다 한결 넓어 안전한 슈퍼싱글로 택했습니다. TV 구입도 매한가지였죠. 대기업 전자제품은 대형 사이즈의 확산 일로여서 중소기업 제품의 작은 놈으로 골랐습니다. 살인적인 무더위 속을 헤치며 여러 곳을 늙은 몸을 이끌며 전 과정을 마친 일은 역설적으로 혼자여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나를 대신해 알아봐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점이 되레 기댈 사람을 만들지 않아 자립배양의 좋은 기회로서 보상받지 않나 싶습니다.
홀로 지낸다고 해서 영혼의 자유가 넝쿨째 굴러올까요. 고독을 길어 올린 내면의 성장부분은 생략된 채 관념적 자유를 부러워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억울한 심정이 들더군요. 결코 자유 하나를 선호해 줄곧 살아온 삶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들 또한 자유가 그리 좋은 거였으면서도 왜 굳이 결혼을 따랐을지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내 나이 70대 초입이었든가 설렁설렁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위 사물들이 세밀하게 다가오면서 깨친 이치가 마음을 편히 대해줄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두 배로 확대되어 버무려질 감동의 도가니가 밀려올 나날을 기대하는 노년입니다. 하나 둘 마음을 내려놓으며 어두워지는 시력이지만 명경처럼 맑아지는 마음의 세계는 노인의 경지라서 누릴 수 있는 특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늙음을 망설임 없이 나는 성큼성큼 걷고자 합니다. 또한 그에 도달한 ‘혼자’라면 ‘부러움의 전당’에 진정 오를 날도 오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