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여름휴가도 끝물인가요. 조석으로 다정하게 부는 바람이 살인적인 더위를 내치려는 기색이 역력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여름을 어떻게 나고 있습니까. 여행길이 곧 고생길이기도 하고 사정 또한 여의치 않아 집에서 편히 지낸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더운 여름철을 피해 봄가을 두 차례로 나눠 여행을 다녔습니다. 혼자여행은 동행인으로 인해 파행되는 불편과 엮이지 않아 편안할 수 있지만 전 과정을 홀로 책임져야 해서 한도를 넘기는 수고가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여행지 또한 젊은 날과 달리 의미 있는 장소를 선호하게 된 노년이 되었어요. 젊었을 적엔 다소 시끌벅적한 감각적인 여행을 즐겼다면 지금은 주목받지 않아 한갓지고 유의미한 곳을 찾아 가슴을 적시는 감동여행을 떠납니다. 목적 없고 홀가분함도 소진시켜 떠난 여행이 최상이라 했던가요. 떠나온 도중에 긴요한 일을 두고 와 불현 듯 되돌아 올 정도의 가까운 곳이라면 이 또한 도전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4박5일간의 문학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기간 내내 역사탐방에 탐닉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애초의 일정은 폭염 끝자락이라 누그러질 날씨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주1회 열리는 인문학강좌의 지도교수가 이끈 글 도반들과의 그룹여행이었어요. 특정 작가의 작품 속 배경 여러 곳에서 눈높이가 확장된 특수효과를 누렸다고 할까요. 중국문학의 아버지 또는 민족의 영혼이라 일컫는 ‘루쉰’ 그리고 여성혁명가 ‘추근’의 활약상이 현장에 가서야 비로소 절절히 와 닿던 것 같습니다. 상하이 샤오싱 항저우 중국의 세 도시를 구슬땀 흘려가며 그때의 현장을 찬찬히 돌아봤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고향에서)” 우리 정치사에서 많이 인용돼 회자되었던 루쉰의 어록입니다. 많이 들어본 대목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번 문학기행이 기획되지 않았다면 루쉰이란 인물에 대해 모르고 지나칠 잘못을 저지를 뻔 했습니다. 그의 글을 대하면 대할수록 암울한 시기를 꿰뚫어본 그의 안목과 천재성에 놀랄 뿐입니다.
1881년생이니 2024년 올해로 탄생 143주기를 맞았습니다. 청나라 태생인 루쉰의 문예활동절정기와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포개진 현상을 어찌 지나칠 일일까요(이 같은 생각을 알아챈 여행기획자가 독립운동 탐방 길도 함께 열어줘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격동기 혼란 속에서도 치열하게 대항할 수 있던 루쉰의 유일한 도구는 거침없이 지르는 그의 필설이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서슴없이 행동에 나섰던 그의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죠. 봉건주의 시대를 통과한 그의 글에는 지금 읽어도 곳곳에 ‘현재성’이 담겨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던진 그의 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상의 빛이 된 겁니다. 늘 민중의 편에 서있었고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는 그의 평가가 이를 뒷받침해줄 단서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대절한 버스가 급기야 항일투쟁의 장소로 묵직한 우리의 마음을 실어다 주었어요.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의 방문 소원을 이뤄냈습니다. 아 그 곳을 찾아가려고 내 나이가 70년 넘게 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통해서만이 알고 지냈던 그 곳에 직접 발을 내딛게 되니 왠지 가슴이 떨리고 욱하는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독립 쟁취의 함성에 휩싸인 듯한 착각에 빠졌지만 굳이 벗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러분, 상하이 아닌 항저우에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다는 점을 아십니까. 두 곳, 모두 외형은 손봤을지 모르겠으나 건물 안은 많은 부분이 복원된 상태라 하더군요. 비좁은 나무계단을 힘겹게 올라야 한 평 남짓 작은 공간들로 이어집니다. 접대실 취사실 회의실과 침실이라고 설명하는데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말만 임시정부청사일 뿐 어찌나 볼품없고 허름했던지 상념에 젖게 했습니다. 정지용의 ‘향수’ 노랫가락에 실려 격전지의 총소리와 말발굽소리가 귓가에 들려 일순 빠져드는 듯 독립투사에게 빚진 마음이 배가돼 되돌아오는 듯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 중국인들 여럿이 자신들 목숨을 걸고 우리 항일투사의 활동을 도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어요. 그들의 사진을 둘러보는 도중에 코끝이 시려왔습니다.
윤봉길기념관에 들어섰을 땐 위풍당당한 그 분 영정이 우릴 반겨주더군요. 그 앞에는 당시 일본군 주요인사를 대상으로 저격했던 화약무기가 담긴 물통과 도시락 모형이 놓여있었어요. 체포될 당시 도시락무기는 일본에게 빼앗겨 보관중이라던데 아직까지 우리정부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의 마지막 형장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두 눈은 헝겊으로 가려졌고 커다란 나무토막에 일자로 묶인 두 팔 그리고 일부러 꿇어앉힌 두 무릎의 자태를 바라보는데 씁쓸했습니다. 그때 그 분의 나이 24세. 풋풋했던 청년의 나이에도 늠름한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 했겠지요. 윤봉길 의사의 시신은 훼손돼 수습되지 못했으며 다른 애국 독립투사마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현실 앞에서 옷깃을 여밀 뿐입니다. 외국에 나가 있으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했던가요. 유의미한 장소를 돌아본 우리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잘못된 역사 인식에 쉴 틈을 주지 않는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독립운동가의 자취를 돌아본 이번 여행과 관련 깊은 광복절행사로 논쟁거리가 되었는데요. 세간에 나도는 요즘 주요 쟁점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우리국민이 ‘일본국적’이었다는 ‘뉴라이트’쪽 사람들의 일방적인 강변이라지요. 민주시민이라면 이런 퇴행적 발언을 암묵적으로도 묵인해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역사적 진실이 이 사회에 알려지기 전까지 긴가민가했을 시민들의 수는 나를 포함한 다수였으리라 보고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반도에 일본의 헌법을 적용하지 않았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에게 일본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무력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방치했습니다. 다만 일본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마다 조선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간주하려 했을 뿐 얍삽하게 동원할 일이 생길 때면 그에 적용하려 들었단 점을 새롭게 인지해야 하는 것이죠. 나도 이참에 제대로 된 역사공부를 이을 좋은 기회로 삼기로 했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시민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입장도 헤아립니다만. 역사는 우리생활과 밀착되어 있고 직결된 사항이니 조금이라도 짬을 내어 깨어있는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말을 건네고 싶군요. 아래 토막글을 첨부하면서.
- 끝을 맺지 못한 한국독립운동사, 재개될 시점을 이로써 맞게 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