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침실을 나온 시간은 13시였다. 간밤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3시 반이었다.
a. 거실 커튼을 걷기조차 귀찮았다. 비가 오는 것 같은데. 베이글을 에어프라이어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14시쯤 커피와 베이글로 점심을 때웠다.
a. 오후 내내 소파에 늘어졌더니 『태엽 감는 새 연대기』1권이 끝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2권도 빌려올걸. 집을 나서긴 싫었다.
b. 가장 두려운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누명이라고 답한 기억이 난다. 아마 11살 때였다. 똑바로 살 자신은 있는데 왠지 근본 없는 세상에 휘말리지 않을 자신은 없어서, 감옥에 갇힐 까봐 무서웠다. 매주 챙겨 보던 <경찰청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b&a. 대학 때 집회에 나갔다 연행된 적 있다. 유치장은 역시 답답했다. 당시 취미가 독서와 날씨 좋은 날 걷기였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황색언론 주간지와 대출이 절대 안 될 것 같은 책 몇 권만 있어 읽을 게 없었다. 창문도 없었다. 당연한 거지만. 48시간인지 72시간인지 만에 동작경찰서를 나오며 아프지 말고 죄짓지 말자고 다짐했다. 누명이 아닌 점은 다행이었다. 36시간 뒤 꾸역꾸역 보러 간 미시경제학 시험에선 B를 받았다.
b. 몇 년 후 스터디를 하던 중 구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가 무기징역으로 갇히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굳이 내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공감된다고 했다.
a&b. 북유럽처럼 시설 좋은 감옥이라면 한 달 정도 갇혀 있다 나와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원하는 책을 넣어 주고 혼자 글 쓰게 해 준다면 말이다. 나에게 그런 생각이 들 때란 세상이 소란스러워 오히려 감옥 같을 때다. 덕분에 이제는 구금이 가장 무섭진 않다. 밀레니엄 시리즈 1권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에서 주인공 미카엘은 한 달간 구금되어 혼자 책 보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 시간이 오히려 평온해서 좋았다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맥락 없이 오비이락이 떠오르는 것은 여전하다. 시계보다 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도.
a.19시쯤 일어서서 밥을 안치고 들기름과 후추 그리고 생강청에 버무린 돼지고기를 볶기 시작했다. 오늘까지만 무기력하고 내일이면 다시 꾸역꾸역 세상으로 나가야 하니까. 다음 주에 먹으려고 쌀뜨물로 끓여놓은 김치찌개 국물이 무심히 맛있다.
a. 일찍 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