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말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다음 날 교무실을 찾아가문과로 바꾸겠다고 했다. 학년부장 선생님은 나 때문에 전교생을 취합한 자료의 숫자를 하나하나 빼고 다시 하나하나 더하며 저렇게 조언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문과를 가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저는 사회가 재밌어서요.
나는 공동체주의자인가? 아니다. 개인주의자들의 삶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개인주의자다. 무너진 공동체는 개인주의자의 삶을 보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세상을 우습게 여기며 일이본질을 비껴가게 만드는 자들이 싫다.일이 본질을 비껴가면 사회가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본질을 비껴나가는 방식으로 처리된다고 생각할 때 불쾌하다. 이때 느끼는 불쾌는 답답함과 분노로 나뉜다.
답답함은 일이 목적을 달성했는지보다, 일을 했다는 사실과 일의 형식만 중요할 때 느낀다. 일이 본질을 잃은 것이다. 목적이 뒷전이 된 일은 비효율적으로 처리되거나, 더 나아가 일의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이해한다. 저런 현상은 공공조직이 지니는 숙명이다. 운영 원리가 이익 창출이 아니니까.
분노는 일이 정도(正道)를 벗어날 때 느낀다. 다수의 탐욕이 얽히거나, 소수의 탐욕이 과도할수록 일은 정도에서벗어난다. 이들은 일의 본질을 탐욕에 이용한다. 이렇게 일이 정도를 벗어나면, 불가피하게공개되는 거짓과,목숨 걸고 공개하지 않는 거짓이 나뒹굴고 일은 엉망이 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싫다. 그들에게나 좋은 거겠지. 그건 좋은 게 아니라 그른 일이다. 좋은 게 좋다 보면 공동체가 망가진다. 옳고 그름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문제고 우리 모두의 일이다.
제도권 정치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관한 규칙을 정하면, 행정은 촘촘한 톱니바퀴가 되어제도권 규칙에 따라 가치를 실제로 배분한다. 사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울타리다. 각각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운영하고, 수호한다.시민은 위와 같은 공적 영역에 민감하고 엄격해야 한다. 시스템은 개인 삶의 양식을 실존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안다는 것은 세상이 점점 돌아버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민주-자본주의 시스템은 정교하게 짜인 판이다. 겉만 그럴싸하고 안에서는 권력과 자본이라는 욕망에 따라 돌아간다. 민주주의는 법으로 제도권을 통제하지만, 자본주의는 구성원의 실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며 제도권과 비제도권 모두를 지배한다. 제도권 내 자본은 민주주의 규칙을 따르는 시늉만 할 뿐이다.
왜 시늉에 불과한지 단면을 보여주는 예는 전관예우다. 전관예우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사법비리 아닌가? 사법 정의 수호와 전관에 대한 예우가 양립가능한 개념이긴 한가? 내부고발자를 공익신고자로 바꾼 것처럼 전관예우라는 표현만이라도사법비리 우려로 바꿔야 한다.
시민은 공적 영역에 민감하고 엄격해야 한다고 말한 나를 돌아본다.이렇게 글을 쓰는 것에 더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공적 영역에 엄격하고 민감한 결과는 무엇인가? 본질을 놓지않는 사회를 위해 의롭고 외로운 길을 걷는 분들을 응원하고 후원이라도 하면 나는역할을 다한 것인가?사회 시스템을 개선하려고 나는 무슨 노력을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