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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주 Jun 06. 2022

마흔이라는 나이

늘 그렇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내 나이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종종 둘째 아이의 나이를 먼저 떠올리고 거기에 나와 아이의 나이 차인 삼십을 더해 내 나이를 계산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내 나이를 확인할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된다.


마흔한 살.

올해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십 대가 되었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 되었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오히려 사십 대가 되고 더 큰 혼란이 시작된 기분이다.


부모님이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때 내가 바라본 두 분의 모습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어른이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가족을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고, 혼자만의 여가를 즐기는 모습도 보인 적이 없었다. 당시 함께 살던 할머니도 살뜰히 챙기면서 이런저런 부업까지 하는 나에겐 완벽한 사람이었다. 아빠도 역시 가족을 위해 본인의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산 꼭대기에 있는 학교에 등교하는 나를 위해 출근 시간을 앞당겨가며, 매일 빠짐없이 라이딩을 해 주었다. 자가용으로 편도 30분 거리, 버스로는 1시간 30분이 걸리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등굣길뿐 아니라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후 하굣길도 빠짐없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내 등하굣길을 책임지기 위해 아빠는 그렇게 좋아하던 저녁 반주도 포기해야 했다.

이런 부모를 보고 자란 나는 어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 내가 보아왔던 그때의 부모님과는 사뭇 다르다.

가족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내가 원해서 선택한 직장 생활을 위해 아이들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밤새 즐기고는 다음날 피곤에 절어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두 아이를 방치한 채 낮잠을 자기도 한다. 가끔은 내 휴식을 위해 싫다고 거부하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긴 채 몇 시간의 외출을 감행한다.

엄마가 행복해야 결국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는 거라며 자위하면서 한편으론 나의 작은 욕망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데, 아이들을 키울 자격이 있는 어른인가 끊임없이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서른여덟이 되던 해, 우리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나는 어쩌다 보니 창립 멤버에 합류하게 되었고, 얼결에 초대 임원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 지난 십여 년 간 회사에서 해왔던 것과는 전혀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하게 된 것인데, 생소한 업무들을 하나씩 배워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노동조합이 자리 잡을 동안만 잠시 맡아서 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업무 자체가 재미있고 기존에 하던 일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았다. 결국 꽤 오랜 기간을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지, 보다 전문적인 영역인 노무사의 길을 선택할지 아니면 기존에 하던 업무로 돌아갈지를 두고 고민했다.

이런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지난 십육 년의 직장생활 기간 내내 계속되었던 일이다. 첫 번째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직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예 업종을 바꾸는 게 낫겠다 싶어 회계사 관련 자격증 시험을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이직에는 성공했지만, 옮긴 회사에서 하는 일도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상담심리사가 되겠다며 사이버대학의 관련 학과에 편입해 학부 수업을 2년 간 수강했지만, 학위를 하나 더 얻는 것에 만족했다. 노동조합에 발 담그기 전에도 사기업에 다니는 것보다 NGO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한다면 보람되고 스트레스도 적지 않을까 싶어 관련 단체들의 구인 페이지를 뒤적거리기도 했다.

이러한 전적이 있다 보니,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또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어른이 되어도 자신의 진로에 대한 확신 없이 내 꿈이 무엇인지,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물음으로 방황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마흔이 되어서도 진로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라는 자조가 절로 나왔다.


내가 십 대이던 시절 들었던, 나이에 관한 유명한 노래가 두 곡이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라는 노래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 두 곡을 듣고 있으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서른 살은 혼돈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나이이고, 그 터널을 지난 마흔 살은 진정한 어른으로 완성되는 시기이겠구나 라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막상 서른을 지나 마흔이 되어보니 아직 나는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마흔 살에는’을 검색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사실 마흔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나이가 아니라 성인으로 완성되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시기는 아닐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이제 겨우 절반을 지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앞으로 더 많이 흔들리더라도 불안해하지 말기로 하자. 한 걸음 씩 내딛다 보면 내가 원하던 어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나를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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