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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y Story

쓰잘데없는 가시나, 말하지마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큰 마음의 상처는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by 운아당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큰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가. 정서적 기아상태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음식을 먹어야 살고, 마음은 스트로크를 받아야 산다.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피드백을 받는다. 그것이 긍정 또는 부정적이든 상관없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니까. 우리 존재를 인정하는 한 단위를 심리학 용어로 '스트로크'라고 한다. 우리는 마음의 음식인 스트로크가 없을 때 스트로크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서적 페르소나를 쓴다. 무 스트로크는 심리적인 죽음이니까.


나는 거의 모든 스트로크는 밖에서 받았다. 친구들과의 놀이가 너무 즐거웠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리더였다. 함께 좋은 일도 하고 함께 놀이도 만들어 노래자랑, 장기자랑 발표회 같은 것도 했다. 동네 어른들에게는 야무지고 똑똑하고 예의 바르고 인사성도 밝다며 칭찬을 많이 받았다. 동네 호랑이할머니를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했지만, 나는 내 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노래로 즐겁게 해드리곤 했다. 그 할머니는 나를 '우리 복실강아지'하며 자신의 손자들보다 귀여워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집에서는 거의 없는 아이처럼 여겨졌다. 엄마는 늘 바빴고 아버지는 무표정이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칭찬해 줄 사람이 없었다. 공허했다. 저녁 어스름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외롭고 대문을 들어서기 싫어서 동네를 몇 바퀴 더 돌아다니다가 어둠이 짙을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나는 말하기를 참 좋아했다. 실제 일어난 사실에다가 재미를 곁들여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좋아했다. 밖에서 마음껏 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에 차 있는 아이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하면서 그날 나의 일상을 재미있게 각색해서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상을 탁탁 치면서 말한다.
"조용히 해. 밥상머리에서 말하는 게 아니야."
어린아이에게 그런 주의가 큰 의미가 없다. 처음에 조용하다가 다시 웃으며 큰소리로 이야기하면 형제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리는데 아버지는 다시 언성이 높아진다.
"어흐. 조용히 하라니까. 쓰잘데 없는 가시나가 오데 한 번 하지마라고 하면 안 해야지. 복 나간다. 말하지 마."

아버지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나눈 대화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수많은 비언어적 억압만 느껴진다. 그런 느낌은 타고난 천성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형제 중 가운데라 어정쩡한 서열이 받는 스트레스일 수 있다. 여동생 둘은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몇 가지 이야기한다. 손을 잡고 '점방'이라고 말하는 가게에 가서 과자도 사주었다고 하고, 아버지가 외출하고 돌아오면서 손에 떡이나 간식거리를 사 와서 맛있게 먹었다는 말도 한다. 나에게는 생경하다. 나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의 불길이 차가운 냉소와 무스트로크에 사그라들어가는 감정적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소심한 복수를 결심했다. '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아버지에게는 1남만 우리 집에 존재하고 4녀는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존재였다. 이런 기류를 어스푸레하게 마음은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는 5살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밀쳐놓고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문을 탁 닫고 나갔다. 어린 내가 엄마의 어깨를 안고 '내가 크면 아들 보다 더 잘할게. 울지마.'하면서 달랬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에 늦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쓰잘데 없는 가시나들'이라고 했다. 어린 아이 마음은 엄마와 화선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엄마의 흐느낌은 바로 나의 슬픔이었다. 슬픔이 먹물처럼 화선지를 통해 전해졌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주는 모멸감은 바로 나에게 하는 태도처럼 여겨졌다. 새마을 지도자로서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으나,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는 나에게는 미워해야 할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무 스트로크는 나에게 기댈 우주가 없는 듯한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있으니 걱정마라. 내가 다해줄게. 뭐든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말을 제일 듣고 싶다.


이해인 님의 '사랑 키우기'라는 시가 떠오른다. 이제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아버지의 삶의 무게와 고통과 그 때의 사회적 통념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상처받은 어린 나는 아직 마음이 아프다. 이제 성인이 된 나는 이해인 수녀님이 말하고 있는 셀프 스트로크라도 줘야할까 보다.


사랑 키우기


이해인


화분에
물을 주어 고운 꽃을 피워 내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사랑이란 물을 주어
우리의 존재를 꽃피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일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를 올바로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현재의 삶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앙상한 고사목에도 올 봄에 싹이 트고 푸른 잎이 무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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