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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y Story

이 신발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죽을 만큼 아파 본 적이 있는가

by 운아당

1999년 12월 29일 병원에 입원했다. 그 다음날 수술을 받고 밀레니엄 첫날을 병원에서 보냈다. 오랫동안 고통을 받던 자궁근종 수술이었다. 그 당시 막내는 6살이었고 큰 딸은 고등학생, 작은 딸은 중학생이었다. 한창 아이들 뒷바라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나의 부서 업무는 내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은 바쁜 상황이었고, 야간대학까지 다니던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휴학 없이 졸업할 것이라 마음 먹었기에 수술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한이 맺혔던 대학,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학위증을 취득하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꽉짜여진 일정으로 돌아가던 시기였기에 내 삶의 굴레에서 내가 빠져나오면 아무것도 되지 않고 엉망진창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수술을 미루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 몸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빈혈이 극도로 심해져서 어지러웠고, 시력도 급격히 나빠져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고 숨도 가빠왔다. 더 이상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일어서면 앞으로 넘어질 듯한 몸을 더 이상 두고 생활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수술하였다.


대학병원에 예약을 하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던가. 이제 수술을 결정하고 나니 담담해졌다. 그런데 집을 비우려니 준비할 것이 많았다. 수술을 하게 되면 병원에서 1주일은 입원해야 하고, 집에서 3주 이상은 쉬어야 한다. 어린 막내아들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유치원 다니니까 큰딸에게는 식사를 챙겨 줄 것을 부탁하고, 작은 딸에게는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오빠네 큰 조카딸에게 나의 병간호를 낮동안 부탁했다. 조카는 대학생이었고 마침 겨울 방학이었다. 큰조카는 어렸을 적에 많이 예뻐해주었던 정이 있는 아이인지라 편하게 부탁을 했다. 밤에는 남편이 병원에서 보호자로 잠을 자기로 했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는 일주일간 먹을 반찬, 국, 간식을 준비해 놓고 빨래도 모아서 빨았다. 집안 살림부터 아이들 보살핌, 나의 직장, 야간대학까지 내가 맡아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아프다는데 다른 누가 맡아서 대신 해줄 사람이 없었다. 집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집을 나서는데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뒤가 휑했다.


막상 병원에서 환자복을 갈아입고 내일이면 수술실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만약 이대로 다시는 이 신발을 신고 병원문을 나서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마취가 잘못되거나, 수술이 잘못되어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쳤다. 제일 마음에 걱정되는 것이 막내였다. 아직 어리니까. 그러다가 '젖먹이는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라고 위안하기도 했다. 딸들은 제앞가림은 할 거야. 남편은 과연 아이들을 잘 돌봐줄 수 있을까. 우리 엄마 먼저 내가 잘못되면 또 어떡하나. 온갖 생각들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다잡은 마음은 '그래,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 지금 내가 가야할 때라면 죽어도 좋아.'였다. 퇴원하고 한참 뒤에 이말을 했더니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무슨 말이냐고 우리는 아직 보살핌을 받아야할 나이라고하면서 울컥하며 눈물을 훔쳤다.


수술이 끝나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자꾸 나를 깨웠다.

"일어나, 일어나라, 눈떠라."

깊은 잠이 달콤했다. 그대로 더 깊이 빠져들고픈 유혹이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뜨기 싫어서 그대로 누워있었다. 수술 들어가기 전 그렇게 염려했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금 깨어나기 싫은 마음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귓전에서 자꾸 내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나는 다시 깨어났고, 수술도 잘되어 퇴원했다. 밀레니엄 해에는 지구 종말이 온다느니, 큰 재앙이 있을거라는 둥, 컴퓨터 오류로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모든 예언을 뒤로하고 세상은 무사히 잘 돌아갔다. 그대가 죽어도 그대가 살아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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